좋아서 하는 일 욥 임용순 셰프 존재만으로 고마운 빵집이 있다. 당산동 욥도 그중 하나다. 가게 입지가 좋지도, 인테리어가 화려하지도, 마케팅 실력이 뛰어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욥은 동네 주민들에게 사랑받는다. 오로지 빵으로만 진검승부하겠다는 욥. 윈도 베이커리에서 잔뼈 굵은 임용순 오너셰프가 일궈낸 결과물이다. 취재․글 구명주 사진 이재희 풍파를 넘은 작은 거인, 욥 처음 임용순 셰프와 통화를 했을 때, 그는 머뭇거렸다. “매장이 작은데 괜찮으세요?” 그의 걱정대로 9평 남짓한 욥은 쉽게 찾기 어려운 상가 한구석에 문을 열고 있었다. 앉을 자리 하나 없는 작은 빵집이건만 손님들은 시시각각 문을 두드렸다. 욥 임용순 셰프는 2012년 2월 20일 월요일을 잊지 못한다. 그날 셰프는 당산동 아파트 단지 주변에 자신의 첫 번째 가게를 열었다. 순풍에 돛을 단 듯 욥은 유유히 순항했다. 작년 7월에는 빵집 맞은편 가게를 인수해 ‘욥 카페’를 열기에 이르렀다. 빵집을 연지 몇 년 만에 매장을 두 개나 가지게 됐으니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셰프는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욥’처럼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신은 일부러 행복한 욥을 시험하려 든다. 재산과 자식을 빼앗는 등 온갖 고통을 안겨 주면서 말이다. “8월 1일 자로 욥 카페를 정리했습니다. 주변에 빵집이 여러 개 생기기 시작하면서 매출이 떨어졌고, 직원 관리도 제대로 할 수 없었거든요. 오죽했으면 카페뿐만 아니라 빵집인 욥까지 없애려고 했겠어요” 욥이 사세를 확장한 2014년 7월부터 2015년 8월까지 아이러니하게도 셰프는 지옥에 떨어진 듯한 나날을 보냈다. 돈은 돈대로 날리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었다. 남들은 출발선을 떠나 저 멀리 뛰어가는데, 셰프 혼자만 철퍼덕 넘어져 있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 윈도 베이커리를 운영한다는 건 얼마나 혹독한 일인가. 경쟁이 치열한 무자비한 서울에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인 수원으로 돌아갈까, 신흥 빵집이 늘어나는 제주도에 정착할까 이리저리 궁리했다. 그때 임용순 셰프를 잡은 건 다름 아닌 단골손님이었다. “욥이 사라지면 어디서 빵을 사 먹어요?” 구약성서의 욥이 재산을 되찾고 건강을 회복했듯이 임 셰프도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었다. 일본 유학이 알려준 것들 태풍이 지나간 뒤의 바다는 더없이 맑고 조용하다. 재오픈한 욥 역시 어느 때보다 평화롭다. 셰프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나는 왜 빵을 만들까 하고 질문해봤어요. 제빵은 재밌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이더군요” 그가 처음 제빵을 알게 된 건 16살 즈음이다. “당시만 해도 홈베이킹이라는 게 지금처럼 보편적이지 않았어요. 빵은 빵집에서 사 먹는 것으로 생각했지 만들 수 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누나가 빵을 집에서 만들더니 나중에는 제과제빵학원에 취직까지 하더라고요. 누나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10살 터울이었던 누나는 동생의 선생님이 돼 주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17살, 임 셰프는 누나로부터 ‘제과제빵 과외’를 받기 시작한다. 누나의 과외 덕분에 그는 제과자격증, 제빵자격증을 손쉽게 딸 수 있었다. 자격증을 손에 쥔 셰프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 대신 취업 전선에 뛰어든다. 파리바게뜨 제빵사로 일을 시작해 군대를 제대한 뒤에는 수원 독일제과에서 2년여간 빵을 만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삶을 흔드는 지각변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터닝 포인트는 일본 유학이었다. “사실 저는 공부를 더 할 생각이 없었어요. 오히려 가족들이 적극적으로 유학을 권했죠. 일본에서 1년간 어학연수를 마치고 그다음 해 동경제과학교에 입학했어요” 10대부터 빵 반죽을 만졌고, 업장에서도 꽤 일했다고 생각했건만 학교에 다니는 내내 얼굴이 뜨거웠다. 기초 공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제빵이라는 집을 지어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주먹구구로 빵을 배웠구나 싶었어요” 빵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기에 앞서 학교는 밀가루, 유제품 등 기본적인 재료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 ‘빵은 과학’이라는 것을 유학을 통해 절실히 깨달았다. 무엇보다 그는 일본의 몇몇 빵집에서 일하며 희열을 느꼈다. 잊을 수 없는 곳은 도쿄 사쿠라 신마치에 위치한 베커라이 브로크하임(Bäckerei Brotheim). “베커라이 브로크하임 오너셰프의 초청 강연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때 오너셰프에게 말했죠. 언젠가 업장에 찾아 가겠다고” 베커라이의 셰프는 그의 말을 지나가는 인사로 흘려들었지만, 임용순 셰프는 진짜로 베커라이 브로크하임에 나타났다. 정식으로 빵집에 취업한 것도 아니면서 그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 매주 토요일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빵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일본인 셰프들은 갑자기 나타나 허드렛일을 나서서 하고, 제품을 배우려 애쓰는 한국인을 그저 신기하게 여겼다. 그를 경계하던 셰프들도 나중에는 마음을 열었다. “어깨너머로 일본인 셰프들이 빵을 만드는 것을 보기만 해도 신기하고 즐거웠거든요. 그들은 빵 하나를 만들면서도 재료, 성분, 위생 등을 철저하게 분석합니다. 체계적으로 일한다는 게 무엇인지 그때 배웠죠” 윈도 베이커리의 새로운 바람을 느끼다 2년간의 일본 생활을 마치고 셰프는 한국에 돌아왔다. 재료를 다양하게 쓰고 최신 장비를 쓰는 빵집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추천받은 곳은 나폴레옹 과자점 본점. 한국에서 손꼽히는 나폴레옹 과자점에 취업했음에도 셰프는 오히려 갈증을 느꼈다. 그때 그는 심상치 않은 변화를 하나 느낀다. “당시 홍대 ‘폴앤폴리나’나 한남동 ‘악소’와 같은 윈도 베이커리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었어요. 빵 하나에만 올인하는 빵집이 등장하는 걸 지켜보며 신기해했죠” 마음이 들뜬 임용순 셰프에게 동경제과학교 동기였던 유기헌 대표(現 브레드랩 대표)가 “여의도에 빵집을 열고 싶은데, 함께 하자”는 제안을 해온다. 나폴레옹 과자점을 관둔 임용순 셰프는 유기헌 대표가 시차를 두고 차례로 오픈한 브레드피트와 브레드랩의 총괄 셰프가 됐다. 두 곳의 빵집에서 임 셰프는 일본에서 보고 배운 것을 토대로 새로운 제품을 만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제품은 역시나 겉도 하얗고 크림도 새하얀 우유크림빵. 지금까지도 ‘브레드피트’ 혹은 ‘브레드랩’이라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제품이기도 하다. “노른자를 넣지 않고 새하얀 커스터드 크림을 만들었어요. 우유의 풍미가 진하게 배어나고 빵의 식감도 쫄깃쫄깃하죠. 일반적인 크림빵과 맛도 모양도 다르다 보니 손님들의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우유크림빵 때문에 고객의 항의도 받아야 했다. 우유크림빵에 사용된 바닐라 빈을 일부 손님들이 이물질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가짜 바닐라를 드신 것”이라며 “이물질로 보이는 검은색 점이 바로 진짜 바닐라”라고 설명을 해야 했단다. 셰프는 훌륭한 빵을 만들기 위해선 복잡하고 화려한 기술이 아니라 ‘좋은 재료’가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돌아와 가장 충격을 받은 것도 한국에서는 좋은 달걀이나 유제품 등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오렌지 빛깔이 나는 좋은 노른자를 찾아다니다가 오히려 충격적인 이야기만 들어야 했다. “색소를 닭에게 먹여 일부러 색이 진한 노른자를 만들기도 한다더군요. 황당하지만 그게 한국의 현실이죠” 브레드피트와 브레드랩을 나와 자신만의 가게를 연 그는 ‘오너셰프’라는 직함의 무게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셰프는 윈도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또래 셰프들과 빵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가 많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제빵과 관련된 것들이다. 최근의 화두는 ‘밀가루’. “옛날에는 좋은 밀가루를 구할 수 없다며 제분회사를 탓하곤 했는데 제 책임도 큰 것 같아요. 주변을 돌아보니 몇몇 셰프들은 우리 밀을 자가 제분한다든지 외국의 밀가루를 쓴다든지 스스로 방안을 찾고 있더라고요. 앞으로 좋은 빵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에도 관심을 더 가질 겁니다” 최근 1년 사이 빵이 싫어질 정도로 고된 나날을 보냈지만, 그는 요즘 행복하다. 가장 기분이 좋은 순간은 손님들로부터 “빵집을 지켜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때다. “손님들한테 칭찬받는 맛에 이 일을 하나 봐요. 오랜 시간 서서 빵을 만들어도 힘들지 않아요” ‘빵이 참 맛있다’는 사람들의 찬사는 셰프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빵을 만들게 하는 힘의 근원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