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레하레 제과점 이창민 셰프 행복을 빚는 제빵사 이창민 셰프는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기보단 앞으로 걸어갈 길을 굽어 살피는 사람이었다. 그는 소중해 마지않는 그의 아내와 세 아이, 같은 길을 걷는 직원들이 하레하레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매일 같이 그리며 미래를 꿈꾼다. 20여 년의 제빵 인생을 차분하게 읊조리듯 풀어내던 그의 따뜻하고 순한 기운은 하레하레에서 솔솔 풍겨 나오는 분위기와 많이도 닮아 있었다. 취재·글 박소라 사진 이재희 올해 제과제빵업계를 뒤흔든 이슈 중 가장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것은 지난 1월 파리에서 열린 제 9회 쿠프 뒤 몽드 드 라 불랑주리(제빵 월드컵)에서 한국이 우승을 차지한 일이었다. 한국 제과제빵업계 사상 처음 있는 경사였으며 자랑스러운 성과였다. 당시 전 세계의 주목 속에 수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세 명의 선수들은 6개월이 지난 지금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본래 임무를 다하고 있다. 그들 중 막내인 이창민 셰프를 만나기 위해 대전 하레하레를 찾았다. 대회는 그저 대회일 뿐,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그는 상장을 매장 한 곳에 진열한 채 그 어느 때보다 더 치열하게, 미래를 위한 오늘을 살고 있었다. 빵을 좋아하던 소년, 제빵사가 되다 이창민 셰프의 어린 시절엔 언제나 빵이 있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니 비교적 쉽게 빵을 접할 수 있긴 했지만, 그에겐 더 ‘멋진’ 배경이 이미 갖춰져 있었다. 바로 ‘빵집 아저씨’를 이모부로 두고 있다는 것. 천안에 뚜쥬르가 생기기 전 응봉동에서 먼저 ‘뚜쥬르’라는 빵집을 운영한 이모부 덕분에 그는 특별한 날이면 상자 가득 담긴 빵을 배부르도록 먹었고, 아버지는 종종 노란 봉투에 단팥빵과 크림빵을 넣어 돌아오셨다. 때문에 그에게 빵은 친숙하고 정겨운 음식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은 그를 자연스럽게 제빵사의 길로 이끌었다. 밥 먹듯이 빵을 먹던 소년은 그 빵을 맛있게 만드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1997년, 군대를 제대한 셰프는 주저 없이 응봉동 뚜쥬르로 향했다. 하지만 제빵사란 직업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그가 살던 동네인 천호동에서 응봉동으로 가려면 새벽 5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달려야 했다. 제빵사의 책임과 보람에 대해 제대로 느껴본 적 없던 초짜 셰프는 매일 같은 강행군에 점점 지쳐갔다. 그런 그를 변화시킨 것은 그 시절 태산과도 같던 공장장, 곽중근 셰프였다. “그 분은 자신의 일을 절대 남에게 미루지 않는 분이셨어요. 밑에 있는 직원들과 똑같이 일하고 본인이 앞장서서 청소까지 마무리하셨죠. 공장장이니까 월급도 많잖아요. 그 모습을 보면서 ‘아 나도 오래 하면 공장장님처럼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기술보다 값진, 제빵사의 기본자세를 공장장으로부터 배웠다. 지금의 셰프를 있게 한 일본 유학 제빵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후부터 셰프는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러다보니 저절로 ‘이론’이 궁금해졌다. 게다가 도쿄에 여행 갔을 당시 한국과는 또 다른 일본식 빵과 케이크의 맛을 본 후부턴 묘한 열정마저 샘솟았다. 때마침 천안 뚜쥬르에 일본에서 유학한 서강헌 셰프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곧장 천안으로 쫓아갔다. 서강헌 셰프의 제과제빵 스타일은 줄곧 일본을 동경해온 그를 자꾸만 자극했다. 서 셰프가 뚜쥬르를 그만두고 나서 그 역시 응봉동 뚜쥬르로 복귀했지만 기술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에 이미 무대는 좁아져 있었다. 결국 셰프는 5년 동안 모은 돈 400만원과 퇴직금 300만원을 들고 무작정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 1년 동안은 어학원을 다니며 닥치는 대로 돈을 모았다. 일본과자전문학교에서 제빵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왜 하필 빵이었을까. 이상하게도 그는 빵에 마음이 끌렸다. 일본과자전문학교를 택한 이유 중 하나도 제빵 교육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한 예로 당시 일본과자전문학교는 프랑스 IMBP, 독일 제빵 학교와 제휴를 맺고 있어 각 학교에서 20일씩 연수를 할 수 있었다. “과자는 정확하거든요. 공정을 잘 지켜서 만들면 흉내는 낼 수 있어요. 그런데 빵은 매번 결과물이 달라요. 그 이유가 늘 궁금했어요” 그 답을 얻기 위해 셰프는 ‘왜’라는 질문을 많이 했다. 매일 똑같은 종류의 기본 빵과 과자들을 반죽하고 굽는 일상이 아침부터 6시까지 이어졌지만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낸 적은 없었다. 짬짬이 복습하며 정리한 자료의 양도 방대했다. 그렇게 1년을 반복하다보니 이론이 저절로 정립됐다. 종일 아르바이트를 하고도 피곤함을 모를 만큼 당시의 그는 빵에 ‘홀려’ 있었다. 일본과자전문학교를 졸업한 셰프는 일본에서 빵, 초콜릿, 양과자 전문점 세 군데를 돌며 1년씩 일을 배웠다. “한국은 제과점에서 모든 품목을 다 팔잖아요. 각각의 대표 품목들을 전문점에서 정석으로 배워보고 싶었어요” 쉴 틈 없이 바빴던 첫 직장인 요코하마의 ‘에스프랑스’부터, 최초의 한국인 셰프였던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해준 쓰지야 고지(Tsuchiya Koji) 셰프의 ‘데오브로마(Theobroma)’, 오래 전부터 목표로 삼을 만큼 동경하던 ‘라비두스(La Vie Douce)’까지. 그가 세 곳에서 터득한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곡차곡 쌓이고 모여 굳건한 지지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지지대로 지금의 ‘제빵사 이창민’을 빚어냈다. 특히 셰프는 라비두스에 취직하게 됐을 때의 벅찬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라비두스의 호리에 신 셰프는 양과자를 정말 잘 하는 사람이었어요. 라비두스의 양과자 스타일이나 맛이 저와 잘 맞기도 했고요. 원래 라비두스는 공석이 잘 나질 않는데, 제가 정말 천운이었던 거죠” 라비두스는 독특한 곳이었다. 모든 직원이 호리에 셰프의 가면을 쓰고 일하는 것처럼 레시피와 공정을 철저하게 지켜 제품을 생산해내고 있었다. 오븐의 온도와 굽는 시간마저 조금의 오차가 없었다. 그것은 곧 라비뷰스가 인정받는 이유였다. 그는 호리에 셰프의 작업 스타일을 보며 제빵사로서의 원칙을 성립했다. 행복이 넘치는 빵집, 하레하레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부푼 기대를 품고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혹한 현실이었다. “응봉동 뚜쥬르에 공장장으로 일할 때였어요. 그 동안 배워온 하드계열 빵이나 마카롱, 무스케이크를 선보였는데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고요. 너무 앞서갔던 거죠” 응봉동 뚜쥬르가 문을 닫게 되면서 개인적으로 휴식기를 가진 그는 마음을 다잡고 전국의 유명 제과점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셰프의 노력과 열정이 빛을 발할 기회가 찾아온다. 천안 뚜쥬르에 생산부장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는 한국의 트렌드를 받아들이고 변형시키는 한편 지금까지의 노하우들을 뚜쥬르의 제품에 녹여냈다. 동시에 뚜쥬르 윤석호 대표로부터 기술자에겐 부족한 사업가로서의 자질을 배웠다. 지금도 그는 빵집을 운영하다 문제가 발생할 때면 ‘윤석호 대표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해보곤 한단다. 이창민 셰프가 ‘내 가게’를 갖기로 결심한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11년의 일이다. 그는 천안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대전 둔산동의 한 상가건물에 16평짜리 가게를 300만원에 계약한 후 6명의 직원과 함께 작은 동네빵집을 꾸렸다. 따뜻하고 밝은 빵집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맑다’는 뜻의 일본어 ‘하레루’의 어간을 이어 붙여 ‘하레하레’로 이름 지었다. 고맙게도 하레하레는 오픈과 동시에 동네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4년여 만에 하레하레 매장을 근사한 작업장을 갖춘 100평 규모로 확장 이전했다. 매장의 크고 작음과 관계없이 이창민 셰프가 반드시 지키는 룰이 하나 있다. 바로 종합 베이커리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 “욕심일 순 있지만 전 동네빵집에는 각각의 손님들이 좋아하는 빵 1~2가지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신 제품 하나하나마다 전문성을 갖추자는 게 제 룰이에요” 그는 평수가 작았을 때도 케이크실과 파이실을 외부에 따로 마련할 만큼 전문성을 고집했고, 여름에는 쉽게 상하는 크림빵을 메뉴에서 배제하거나 작업 환경이 미흡한 초콜릿은 밸런타인데이 시즌에만 선보인다는 등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왔다. 올해 1월에 열린 제빵 월드컵에서의 우승은 하레하레의 명성을 드높인 전환점이었다. “처음엔 하레하레를 제대로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런데 막상 예선을 통과하고 나니까 욕심이 생겼어요. 사실 이 대회는 정해진 시간 안에 얼마나 완벽하게 제품을 만드느냐가 관건이에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반죽법부터 바꾸고 대신 디테일에 최대한 신경을 쓰려고 날마다 시뮬레이션을 했어요” 결국 무던한 연습의 결과는 우승이라는 꼬리표로 분해 그들에게 영광을 안겼다. 하지만 이창민 셰프는 대회 후 오히려 더 엄격하게 제품을 만들고 있다고 고백한다. “대회는 대회고, 저는 또 제 할 일을 해야죠. 이젠 결과에 부합할 수 있어야 하니까 더 열심히 변함없는 빵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에서 가장 예쁜 그림 이창민 셰프는 처음 하레하레를 오픈했을 당시 자신을 따라온 직원들을 혹사시켰던 게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빵을 만들고 파는 것 이상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 역시 품 안에서 놓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때부터 셰프는 근무 시스템을 개선하고 제과제빵 설비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현재 하레하레는 전 직원 2교대 근무와 월 8일 휴무, 일정한 퇴근시간 등의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2층 작업장에는 에어컨과 환풍기도 구비되어 있다. 심지어 조만간 계획 중인 2호점의 콘셉트는 무려 ‘직원들이 만족하는 회사’가 되는 것이란다. 매장보다 공장 설비에 더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고 하니 그의 직원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저는 직원들이 하레하레에서 일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좋겠어요. 손님들에게 맛있는 빵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고요. 물론 그러려면 제가 더 노력해야죠” 스스로를 미래지향적인 사람이라 칭하는 그는 실제로 한 번 지나온 길에 미련을 두는 법을 몰랐다. 그렇기에 무엇을 결정함에 있어 누구보다 신중을 기했으며, 그 선택은 그의 등을 보며 걸어오는 직원들이 한명 한명 늘어날수록 무거워졌다. 그런 그가 미래에 꿈꾸는 그림은 다 같이 오래오래 하레하레라는 ‘꽃길’을 걷는 것이다. “저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건 의미가 없잖아요. 같이 잘 살아야죠. 제 밑에 있는 친구들이 ‘이 정도면 제빵사 할 만 하구나’ 보람을 느끼고 꿈을 꿀 수 있게끔 만들어주고 싶어요”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어야 좋은 것이 어디 빵 뿐일까. 진정으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빵을 만드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창민 셰프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비결은 부드러운 인상 속에 숨겨진 강직한 성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