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밀 박상규 셰프 성실함의 미덕으로 제빵사라는 직업이 학생들 사이에서 유망직종이 되기까지, 뒤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제과제빵업계의 발전을 위해 성실히 애써온 사람들이 있다. 빵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부터 업계에 입문하여 몇 십 년 동안 외길을 걸어온 기술인들. 박상규 셰프도 이들 중 한 명이다. 자신의 앞날과 빵집의 성공보다 업계의 미래를 고민하는 그에게 제빵사로서 35년의 시간은 값진 재산이었다. 취재•글 박소라 사진 이재희 ‘빵’이라는 동아줄을 잡다 어느 나라든 도시와 지방은 환경적으로 차이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박상규 셰프가 어린 시절을 보낸 1970년대 전라남도 해남은 서울에 비해 30년 정도 낙후돼 있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던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농부가 되고 싶지 않았다. 유일한 방법은 기술을 터득해 하루빨리 생활력을 갖추는 것.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당시 이대 앞에 위치한 제과점 ‘그린하우스’에서 일하는 친척을 쫓아 상경을 했다. 1882년, 박상규 셰프가 제과제빵을 시작한 해였으며 그린하우스는 그의 첫 번째 빵집이었다. 훌륭한 제빵사가 되기에 그의 삶은 너무 버거웠다. 하물며 고무신을 신고 책보를 동여맨 채 학교를 다니던 시골 남학생이 빵이란 걸 접할 기회가 있었을까. 그는 그저 돈을 벌고 싶었다. 숙식이 제공되고 적은 금액이라도 월급을 받을 수 있으면 그보다 좋은 일자리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빵집은 최고의 일자리였다. 1980년대는 지금과는 달리 윈도 베이커리가 성황을 이루던 때였다. 그 무렵 나폴레옹, 태극당과 함께 서울을 주름잡았다던 그린하우스는 이대의 터줏대감이었다. 30여 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을 만큼 규모가 큰 제과점이라 작업량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새벽같이 출근해 잔업까지 마치고 나면 밤 11시가 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던 그는 손으로 하는 거라면 뭐든 빨리 터득했다.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선배들의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우며 케이크 아이싱, 빵 성형 등을 담당하는, 일명 ‘주말이(부공장장 아래의 직급으로 업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로 성장하기까지 4년 반을 그린하우스에서 보냈다. 제빵사가 되는 꿈 그린하우스를 떠나 셰프는 군대에 입대했다. 3년이란 시간은 적어도 한 사람의 생각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그때만 해도 학력이 낮은 청년들은 현역을 가는 일이 드물었거든요. 주변에 온통 대학 다니는 엘리트들뿐인데 전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으니까 괜히 부끄러워지더라고요. 게다가 그땐 사회 인식이 지금이랑 달라서 제빵사는 천한 직업이었어요. 제대하면 나도 기술 말고 공부를 배우겠다고 다짐했죠”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가진 거라곤 4년 반 동안 해온 빵 만드는 재주 하나뿐이었으니 이미 이십대 중반인 청년에게 별달리 무슨 도리가 있었을까. 현실을 받아들인 셰프는 생각의 각도를 비틀었다. 어쩌면 가장 빨리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빵일지도 모른다고. 그때부터 그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다. 기술을 익혀 보란 듯이 내 가게를 여는 꿈. 크라운 호텔에서의 3개월은 그의 꿈을 한 번 더 각인시켜주었다. “실은 호텔업계에 발을 들이고 싶어서 경험 쌓으려 들어간 거였어요” 흔히 기술인들이 갖는 호텔에 대한 동경심을, 그 역시 갖고 있었던 것. 하지만 화려할 줄만 알았던 호텔 주방은 호수 밑에 숨겨진 백조의 다리와 같았다. 윈도 베이커리에 비해 일의 강도는 약했지만 이제 막 기술에 대한 갈증이 일던 그의 욕심을 채우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윈도 베이커리의 시스템에 익숙했던 그에게 호텔 주방의 풍경은 낯설게 다가왔다. 긴 방황 끝에 그는 윈도 베이커리로 돌아왔다. 원당에 위치한 ‘샬롬 제과’. 직원이 5명 정도 있는 작은 빵집에 책임자로 입사했다. “일부러 규모가 작은 동네빵집을 택했어요. 빵집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싶기도 했고 현장에서 좀 더 기술을 쌓고 싶었거든요. 책임자긴 하지만 사실 큰 빵집의 공장장이랑은 개념이 달라요. 수십 명의 직원들을 이끌고 지시를 내리는 게 아니라 함께 일한다는 느낌이죠” 그는 매일 아침 후배들과 똑같이 출근해 빵을 만들고 사장 대리인으로 운영을 돕기도 했다. 제빵사들 모임에 나가거나 세미나에 참석해 기술을 연마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샬롬제과에서 쌓은 5년간의 경험은 훗날 그가 가게를 운영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됐다. 잔뼈 굵은 동네빵집 오너셰프 10여 년간 여러 윈도 베이커리를 거친 박상규 셰프는 1995년, 미아리에 당시 즉석 빵집 체인이었던 ‘이딸리앙 베이커리’를 오픈했다. 작업장에 2명, 홀에 2명의 직원을 둔 13평짜리 작은 빵집이었다. 매대에는 건강빵이 아니라 옛날 팥빵과 조리빵, 도넛, 크로켓 등이 가득했다. 그는 오너 겸 공장장으로 매장 운영을 도맡고 모든 제품의 생산도 책임졌다. 막상 오너셰프가 되고 보니 누군가의 빵집에서 직원으로 일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문을 여는 순간부터 닫을 때까지 매장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당시 이딸리앙 베이커리에는 그를 성공가도로 올려준 인기제품이 하나 있었다. 잼과 커스터드가루를 묻힌 잡곡 도넛. 하루 100개 이상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였다. 덕분에 그는 하루 종일 도넛을 튀겨야 했다. 빵 하나의 가격이 400원이던 시절 평균 50만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으니 완벽한 성공이었다. 7년 후, 이딸리앙 베이커리가 시대의 흐름 속에 묻혀 사라질 때쯤, 그는 도넛 하난 기가 막히게 튀겨내는 달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난은 예고 없이 그를 찾아왔다. 건강에 적신호가 온 것이다. 결국 그는 규모를 확장해 생산 책임자를 따로 두기로 한다. 이딸리앙 베이커리를 후배에게 넘겨주고 2003년, 관악구에 25평 규모의 빵집을 오픈했다. 관악구의 대표빵집으로 13년간 유명세를 떨쳤던 ‘케익하우스 밀레’는 그렇게 탄생했다. 셰프는 케익하우스 밀레를 빵부터 케이크까지 모든 품목을 갖춘 토탈 베이커리로 꾸몄다. 주고객층인 주민들의 입맛과 수요를 제대로 간파한 케익하우스 밀레는 동네빵집으로서 건실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프랜차이즈 빵집이 급증하면서 밀레 근처에도 파리바게뜨가 생겼지만 끝내 버티지 못하고 5년 만에 문을 닫기도 했다. 올해 초 재개발로 인해 케익하우스 밀레가 갑작스럽게 문을 닫게 되면서 셰프는 현재 아파트 상가에서 소규모 빵집 ‘레드밀’을 운영하고 있다. 사실 레드밀은 작년에 오픈한 케익하우스 밀레의 세컨드 매장이다. 초창기에는 건강 빵집이었지만 밀레가 문을 닫고 나서부터는 주민들의 요청에 맞춰 구운 크로켓, 도넛, 조리빵, 마카롱 등 품목을 차츰 늘리고 있다. 그는 올해 안에 뜻하지 않게 문을 닫은 본점을 레드밀로 이름을 바꿔 재오픈할 계획이다. 95년부터 지금까지 그의 빵집은 이딸리앙 베이커리에서 케익하우스 밀레로, 그리고 레드밀로 세 번 이름이 바뀌었으며 규모도 전에 비해 많이 축소됐다. 시대가 변해 더 이상 예전의 영화를 누리진 못할 테지만, 그가 꿈이자 목표였던 빵집의 문을 닫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의 30년을 위하여 박상규 셰프는 올해로 제빵 인생 35년을 맞이했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에게 가장 보람된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는 2007년 제과기능장 자격증을 취득했을 때와 작년 여름 제빵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에서 1등을 했을 때 가장 기뻤다고 고백했다. “제과기능장 자격증은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져본 자격증이었어요. 요즘엔 다들 자격증부터 따고 시작한다지만 옛날에 그런 개념이 어디 있었겠어요. 일하다가 필요하면 따는 거죠. 진짜 열심히 공부해서 2년 반 만에 합격했어요” 당시 전국 제과인들 중 기능장은 200여 명에 불과했다. 그 무리에 내가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셰프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기능장만이 가질 수 있는 ‘제과기능장의 집’이라는 꼬리표를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높은 곳, 케익하우스 밀레의 간판에 당당하게 박아 넣었다. 그 무렵 관악구에 있는 제과기능장의 집은 케익하우스 밀레가 유일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늘 학력에 대해 아쉬움을 가졌던 그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고 한국호텔직업전문학교 제과제빵과도 졸업했다. 조만간 석사학위도 딸 계획이란다. 그는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열린 기능올릭픽을 비롯해 월드 초콜릿 마스터즈, 제빵 월드컵 등 다양한 국가대회에 지도위원 혹은 감독으로 참가했다. 그 중에서도 제빵 월드컵은 의미가 남다르다. 비록 선수는 아니어도 그에게 우승이라는 상을 안겨준 유일한 대회였다. “전 한 번도 국가대회에 선수로 출전해본 적이 없어요. 어떻게 보면 그 한을 지도위원으로 푼 거죠. 지금이라도 이런 기회가 주어져서 감사해요. 좋은 성적을 거둬서 더 감사하고요” 사실 선수들을 포함해 그 어느 누구도 아시아 예선전에서 1등을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만큼 기쁨은 두 배로 다가왔다. “외부활동을 많이 하니까 다들 제가 빵 못 만드는 줄 알아요” 첫 만남 때, 능수능란하게 반죽을 휙휙 돌리더니 순식간에 소시지 빵 하나를 완성해 보이며, 박상규 셰프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현재 ㈔한국제과기능장협회 부회장이자 ㈔대한제과협회 기술분과위원장을 겸임하고 있으며 여러 국가대회의 지도위원으로 후배들을 이끄는 등 업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자리에 있기까지 그 또한 열악한 제과제빵업계에서 20여 년간 동네빵집을 운영하며 녹록치 않은 길을 걸어와야 했다. 이제 그는 한 걸음 뒤에 서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앞으로의 30년을 굽어본다. 그와 같은 길을 걷게 될 후배들을 위해, 그들이 화사하게 밝혀줄 제과제빵업계의 미래를 기대하며. Park Sang Kyu 약력 1882년 그린하우스 이대본점 근무 1884년 그린하우스 중앙대점 근무 1889년 샬롬제과 근무 1995년 이딸리앙 베이커리 오픈 2003년 케익하우스 밀레 오픈 2007년 제과기능장 자격증 취득 2014년 우수숙련기술인 선정 2015년~現 레드밀 2016년 프랑스 제빵 월드컵 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