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제리가마 김경민 셰프 착실하게 한 걸음씩 “이 길이 내 길이려니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인터뷰를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 김경민 셰프는 자신의 20년 제빵 인생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처럼 어릴 적부터 ‘빵쟁이’를 꿈꾸었던 것도, 제빵사에 대한 열망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던 그는 우연히 시작한 제빵을 지금까지 물 흐르듯 당연하게 해오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시작한 것에 대해서만큼은 일말의 후회도 없다고 했다. 그것은 그가 매순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내세울 것은 성실함 하나라는 남자. 만약 제빵사의 인생이 한 편의 드라마라면, 김경민 셰프라는 드라마는 필시 매사 긍정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훈훈한 명품 드라마일 것이다. 취재·글 박소라 사진 이재희 어느 날 갑자기 빵이 내게로 왔다 때는 1998년 3월. 교복을 벗은 스무살 청년들이 대학교 문턱을 처음 넘던 날, 한 남자는 김상엽제과제빵학원의 문을 두드린다. 그는 뭣 모르고 시작한 이 일이 적성에 맞는 것인지 생각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학원 친구들과 놀면서 밀가루를 만지는 것이 재밌었다는 한줄 감상평이 전부. 김경민 셰프가 제과제빵을 시작한 계기는 이토록 단순하다. 그러나 20세의 그는 자신이 살아온 날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 어엿한 오너셰프가 된다. 학원에서 6개월간 제과제빵을 배우고 셰프는 능동의 백합베이커리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때 오너셰프는 하얏트 호텔 출신으로, 버터 크림으로 꽃을 짜는 등의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때문에 매장에는 버터 크림 케이크를 비롯한 온갖 고전적인 제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기본기를 탄탄히 다진 덕분에 다음 직장에서 잘 적응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무엇보다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과 한 번 시작하면 진득하게 끝을 보고야 마는 성미는 백합베이커리뿐만 아니라 훗날 많은 빵집에서도 그를 지탱했다. 두 번째 직장은 일산에 위치한 제과점 ‘빠나미’. 빠나미는 일산에서 이름을 떨치는 3대 빵집 중 하나로, 백합베이커리와는 달리 최신 생크림케이크가 주를 이뤘다. 무엇보다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던 송영광 셰프는 여러 경험을 통해 익힌 기술들을 빠나미에서 선보였는데, 이는 곧 그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는 빠나미에서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재료나 새로운 기술들을 습득했다. 이는 한창 배우는 재미를 느끼는 5,6년차 제빵사에게 좋은 기회였다. “잡지의 달력 페이지를 보면 세미나 일정이 있잖아요. 그걸 체크해두었다가 한 달에 한 번씩 쫓아다녔어요. 일하는 틈틈이 배우고 연습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던 것 같아요” 빠나미는 꽤 장사가 잘 됐다. 그가 입사한 지 2년이 지난 후에는 일산에서 매출이 가장 높은 빵 굽는 작은 마을을 제칠 정도였다. 주말이면 500만원의 매출을 달성하는 그곳에서 셰프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4년을 일했다. 그리고 그 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초보 제빵사는 번듯하게 성장했고 함께 일하던 동료는 아내가 됐다. 빠나미에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그는 첫 번째로 아내를 꼽았다. 아내는 예나지금이나 그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매출 두 배의 신화 빠나미를 그만둔 후 셰프는 안스 베이커리로 직장을 옮겨 과장직을 맡았다. 그때만 해도 안스베이커리는 규모가 작았고 막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책임자를 맡은 선배랑 먼저 제품을 싹 리뉴얼 했어요. 같은 빵이라도 성형을 달리 한다던가 충전물을 손님층의 기호에 맞게 바꾸면 180도 달라 보이거든요” 이와 함께 그가 고집한 것이 하나 있다. 매대에 빵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 제빵사들이 퇴근 직전에 빵을 구워 진열대에 채워놓으면 밤늦게 빵을 사가는 직장인 손님들도 부족함 없이 빵을 구매할 수 있다는 원리였다. 이는 안스 베이커리의 매출을 150만원에서 300만원까지 급상승하도록 만들었다. 차츰 경력이 쌓이고 그 역시 책임자를 맡을 단계에 다다랐을 때, 그는 안창현 명장에게 일본 연수를 요청한다. 그렇게 가게 된 곳이 일본 교토에 위치한 ‘라미듀빵’이다. 라미듀빵은 백화점 매장을 갖고 있어서 오전에 물량을 채우려면 새벽에 일을 해야 했다. 시스템이 이렇다보니 낮 시간은 자유로웠는데, 셰프는 이 시간이 아까워 교토의 빵집과 양과자점을 숱하게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동안 제가 익힌 것들과 다른 제품, 방식들을 경험하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100일간의 짧은 연수였지만 그는 일본에서의 날들을 잊을 수가 없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마인츠돔에 책임자로 입사했다. 마인츠돔은 생지 등의 제품들이 본사에서 배송되는 프랜차이즈 형태의 베이커리였다. 첫 책임자 생활인만큼 경험을 위해 마인츠돔을 택했지만 생지로 만든 빵을 제공하려니 제빵사의 입장에서 그리 탐탁지 않았단다. 결국 그는 본사 물건을 반으로 줄이고 대신 직원을 늘려 빵을 직접 만들기로 한다. 생지로 만든 빵과 반죽한 빵의 맛이 다른 건 당연지사. 마인츠돔의 매출은 눈에 띄게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을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서강헌 셰프가 그에게 러브콜을 한 것이다. 사실 그가 처음 서강헌 셰프를 만난 것은 빠나미에서 근무할 무렵이다. 송영광 셰프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스승인 서강헌 셰프가 빠나미의 컨설턴트로 일한 적이 있는데, 김경민 셰프는 제품은 물론 자기관리도 완벽한 서강헌 셰프를 보고 동경의 마음을 품었었노라 고백했다. 그때 시작된 두 셰프의 인연은 지금도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국내 매출 1위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식품관에서 본누벨은 인지도 덕분에 인기가 많았다. 김경민 셰프는 이 매장의 책임자였다. 당시 본누벨에는 좁은 공간에 쇼케이스와 작은 주방이 하나씩 있었다. 환경 상 케이크는 압구정점에서 배송되고 빵은 10여 가지뿐이었다. 셰프는 또 다시 리뉴얼을 감행했다. 제품의 가짓수를 두 배로 늘리고 건강빵 위주였던 제품군에 저렴하고 가벼운 빵류를 추가해 소비자들을 공략한 것이다. 그의 전략은 대성공이었다. 그가 일하는 동안 본누벨은 월매출 1억을 꾸준히 달성했다. “매출이 오르는 것을 실감하는 재미가 컸어요. 크리스마스 시즌엔 케이크가 종류별로 100개씩 1,000개가 팔렸거든요. 그런데도 그때가 다가오면 막 신이 났어요. 그렇게 3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네요” 게다가 서강헌 셰프는 매장 디스플레이도 직접 손댈 만큼 철저한 오너였다. 김경민 셰프는 서 셰프를 통해 매장 운영방식을 어깨너머로 배우곤 했다. 또한 백화점 매장은 직원이 빵을 만들면서 손님도 응대해야 했기에, 본누벨에서의 경험은 경영면에서도 많은 도움이 됐다. 인터뷰 도중,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매출을 끌어올리는 셰프의 전략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드라마틱한 대안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과 스스로 만족스러운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책임을 그저 ‘당연한 일’이라는 말로 치부한다. 하지만 제빵사로서 그가 한 모든 당연한 일은 매번 매출 상승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 공식은 그가 거쳐 온 모든 곳에 적용됐다. 물론 그것을 한 사람만의 성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또한 그가 가진 능력이며 장점일 터다. 남성역의 유명 빵집, 블랑제리가마의 비밀 김경민 셰프는 2013년 남성역 근처에 블랑제리가마를 오픈했다. 제과업계의 시쳇말로 ‘시다바리(보조)’부터 과장, 책임자까지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온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내세워 마련한 첫 가게였다. 가마라는 상호는 서강헌 셰프가 지어준 것. 우리말로 오븐을 뜻하는 가마는 강직하게 한 길만 고집한 그와 어쩐지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블랑제리가마가 등장한 무렵, 지금의 동네는 죽은 상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이곳에서 승부할 자신이 있었다고 했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그동안 배운 제품들을 다채롭게 선보이며 토탈 베이커리를 꾸려나갔다. 지금은 초콜릿 외 대부분의 품목들이 매장에 마련돼 있으며, 식빵을 제외한 전제품에 호밀 발효종을 사용하고 있다. 제품을 만들 때 그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제품이 항상 일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크림빵의 크기, 빵에 넣는 쿠프의 개수 등 그에게는 나름의 제빵 매뉴얼이 있다. “누구에게 맡겨도 같은 맛과 형태의 빵이 완성돼야 소비자가 늘 똑같은 빵을 접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사실 전 좀 집요하게 직원들을 지켜봐요(웃음). 아마 제가 주방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그거 맞아? 확인했어?’일 거예요” 그러나 게으름 한 번 피우지 않는 사장님을 믿고 따라오는 직원들 덕에 블랑제리가마의 제품은 마치 여러 명의 김경민 셰프가 만든 듯 정교하고 일정하다. 또한 그가 추구하는 빵은 ‘다음날 먹어도 맛있는 빵’이다. 갓 구운 빵이 맛있다는 절대 불변의 진리가 아닌, 시간이 지나도 맛이 변하지 않는 마법 같은 진리. “보통 빵을 사면 그날 다 먹지 않잖아요. 다음날 먹었을 때 완전 다른 빵이 됐다면 그건 만드는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남다른 철학 때문인지 블랑제리가마의 매출은 오픈 때부터 지금까지 상승곡선을 달리고 있다. 3명이던 제빵사는 7명이 됐고, 15평 빵집은 22평으로 넓어졌다. 주말이면 매출이 300만원에 달한다. 그의 전략이 이번에도 통한 것이다. 블랑제리가마는 올해 5년차에 접어들었다. 그는 이 동네에서 블랑제리가마가 가장 유명해졌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블랑제리가마는 이미 남성역에서 ‘맛’으로 알아주는 빵집이다. 이제 그는 더 구체적인 꿈을 꾼다. 올해 안으로 소규모 빵 전문점을 내고 두 매장이 안정되면 하나 더 매장을 오픈해 총 3개의 매장을 갖는 것이 목표다. 또 언젠가는 자신이 소유한 건물에서 빵집을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래야 직원들의 복지도 더 나아질 것이며, 이는 결국 블랑제리가마의 제품이 업그레이드 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문득 그가 20년의 경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기능장이란 타이틀 하나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제품의 수준을 제가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능장은 언제라도 딸 수 있으니까요” 본지의 해당 코너에는 셰프가 제안하는 제품 2가지가 소개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두 제품이 간택되는 과정까지 혼자 고심을 했단다. 새로 개발한 제품을 소개해야 할지, 대표제품을 소개해야 할지에 대해서다. 결국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가 정성스레 포장해 내어준 케이크와 빵은 정말로 탄성을 자아낼 만큼 맛있었다. 성실함과 꾸준함을 이길 재능은 없다던 옛 말처럼, 블랑제리가마의 빵 맛은 어쩌면 그의 성실함으로 완성된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