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워커힐 서울 신만식 부제과장 24년의 시간, 끝나지 않은 달리기 신만식 셰프는 제과보다 제빵이 자신에게 더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이유인 즉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빵이 커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한 덩이의 빵이 완성되는 순간 그는 희열을 맛보곤 했다. 빵을 대하는 그의 마음은 꼭 제빵사로서 묵묵히 앞을 보며 길을 걷는 모습과도 닮아 있다. 한 결 같이 우직한 제빵사. 신만식 셰프는 그 어떤 구불구불한 길을 맞닥뜨릴지라도 곧게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취재•글 박소라 사진 이재희 요리가 즐거웠던 소년, 꿈을 발견하다 50여 년의 전통을 지닌 그랜드 워커힐 서울. 봄이면 분홍 벚꽃이 길목마다 흐드러지게 피고 건물을 등지고 서면 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명소인 이곳에서 18년간 빵과 디저트를 만들어온 사람이 있다. 한국호텔제과사협의회의 신임 회장인 백대진 제과장을 도와 그랜드 워커힐 서울의 제과부를 이끌고 있는 신만식 부제과장이 주인공이다. 그랜드 워커힐 서울이 역사를 일군 수많은 시간의 일부에는 그와, 오랜 시간 마찬가지로 그랜드 워커힐 서울에 몸담아온 동료들의 인생이 함께 흘러갔다. 빵쟁이로 살아온 지 올해로 24년, 신만식 셰프의 이야기는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상북도 문경에서 한 농가의 자식으로 나고 자란 그는 대구에서 대학을 다녔다. 대구전문대학교 보건행정학과에 입학했지만, 그는 1학년을 채 마치기도 전에 보건 분야가 적성에 맞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단다. 고민 끝에 낸 결론은, 하루라도 빨리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길을 바꿔야 한다는 것. 그는 자신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짧은 인생을 되짚었다. “어릴 적 어머니를 도와 술 빵을 찌거나 부침개를 굽곤 했는데, 그때 서툰 솜씨로 반죽을 만들던 일이 즐거웠어요. 문득 그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 해 12월, 그는 대학교 근처 풍차 제과점에 아르바이트로 들어갔다. 접해본 빵이라곤 기껏해야 분식점에서 파는 크로켓 혹은 ‘땅콩 샌드’라는 양산 빵이 전부였던 그의 첫 직장이자 첫 빵집, 풍차 제과점은 직원이 3명뿐인 작은 빵집이었다. 당시 대구에서 이름을 떨치던 공주당, 스텔라제과점 같은 큰 빵집에 비할 바가 못 됐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작은 빵집이기에 아르바이트임에도 많은 일을 배울 수 있었다. 때론 반죽을 하고, 때론 빵을 구웠다. 이론부터 차근차근 배운 건 아니어도 제빵사의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몸으로 혹독하게 익힐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월간 <제과제빵(현 파티시에)>을 통해 그의 인생을 바꿀 한 광고를 보게 된다. “당시 잡지에 리치몬드 상가가 대치동에 오픈했다는 광고가 있었어요. 이상하게 여기에서 일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스치더라고요” 마침 풍차 제과점 대표와 리치몬드 제과점의 인연으로, 그는 거짓말처럼 졸업과 동시에 리치몬드 제과점에 취직할 수 있었다. 리치몬드 제과점은 규모가 큰 만큼 파트별로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었다. 그는 풍차 제과점에서 미처 터득하지 못했던 제과제빵의 기본 기술을 리치몬드 제과점에서 체계적으로 습득해나갔다. 한 달에 네 번 휴무가 되면 동료들과 마산의 코아양과, 부산의 비엔씨 등 전국의 유명 빵집들을 돌아다니곤 했다. 25년 만에 상경해 본격적으로 제빵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의 인생이 순탄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으나, 그 역시 열악한 환경과 적은 봉급에 수없이 낙담했고, 망설였다. 아침 일찍 출근해 저녁 늦게 퇴근하는 것이 그 시절의 흔한 빵집 풍경이었다. 힘에 겨워 도망가고 싶어질 때마다 그는 자신의 부모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두 분 다 농사꾼인데 지금껏 본인들의 일에 대해 한 번도 군말을 한 적이 없으세요. 늘 우직하게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끝내셨어요. 한 번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부모님도 이렇게 하시는데 내가 주저앉으면 안 되겠다” 뿐만 아니라 직원들과 빵 테이블을 빙 둘러 마주보고 서서 반죽을 빚고 일상을 나누던 짧은 시간들이 그에겐 돌파구였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만의 노하우가 생기고 원하는 대로 빵을 만들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점점 빵을 만드는 일이 즐거워졌다. “경험을 통해 아는 것들이 있잖아요. 이렇게 반죽을 하면 부드럽고 촉촉한 빵을 만들 수 있구나, 반죽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루면 기공이 제대로 열린 빵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식의 지식들을 알아가는 게 재미있더라고요” 워커힐 호텔과의 운명적인 만남 리치몬드 제과점에서 일한 지 언 5년이 되어 가던 어느 날, 그는 문득 조금 더 여유로운 환경에서 오랫동안 빵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호텔업계로 눈을 돌린 것은 그 무렵이다. 1998년, 리치몬드 제과점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그는 신라호텔, 힐튼 호텔, 그랜드 하얏트 서울, 더 플라자 등 서울의 특급 호텔들을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종호텔 제과부에 입사했다. 당시 세종호텔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방문으로 여러 행사를 준비하느라 매우 바쁜 시기였다. 때문에 그는 호텔 제과부의 업무를 파악하기도 전에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장에서 제 몫을 하느라 숨이 가빴다.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호텔은 빵집과는 또 다른 세계에요. 제과뿐 아니라 조리, 서비스 등 다양한 파트의 직원들이 있고 방켓, 케이터링 같은 행사도 많아서 신경 쓸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정해진 물량만큼 빵만 만들 줄 알았지 테이블 세팅이나 디스플레이는 젬병이었으니까 힘들었던 거죠”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협업하여 하나의 행사를 완성해가는 일이 즐겁기만 했다. 6개월이 지나 호텔업계에 완벽하게 적응한 그는 곧 더 큰 규모의 호텔에서 꿈을 펼쳐보고 싶어진다. 그런 그를 하늘이 도운 것인지, 때마침 그랜드 워커힐 서울에서 셰프를 채용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99년에 입사해 자그마치 18년. 그의 제과인생 8할은 그랜드 워커힐에서 형성됐다. 6개월~1년을 주기로 파트를 옮겨 업무를 로테이션 할 수 있는 호텔의 시스템 덕분에 신만식 셰프는 다양한 분야를 빠른 시간 내에 두루 익힐 수 있었다. 그랜드 워커힐 제과부는 백대진 제과장을 중심으로 약 35명의 직원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그는 현재 R&D 담당이자 부제과장을 역임하고 있다. 그랜드 워커힐을 비롯해 얼마 전 새로 오픈한 비스타 워커힐의 베이커리 메뉴들은 호텔 제과부가 책임진다. 특히 호텔 로비에 마련된 델리에는 10종이 넘는 케이크와 30여 종의 빵이 보기 좋게 마련돼 있으며, 전통을 중시하는 호텔의 특성상 클래식한 제품들이 주를 이룬다. 이와 함께 계절마다 진행되는 특색 있는 프로모션들은 그랜드 워커힐만이 가진 차별점이다. “봄이면 딸기 뷔페인 ‘베리 베리 스트로베리’와 벚꽃 축제가, 여름이면 빙수 프로모션과 풀 파티가 열려요. 또 가을에는 석류, 블루베리, 무화과 등 가을 재료로 구성된 ‘뷰티프루츠 디저트’ 프로모션을 진행하죠” 이중 베리 베리 스트로베리는 호텔을 대표하는 대규모 프로모션. 취재 당시 로비의 더파빌리온 카페에서는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올해 10주년을 맞이한 만큼 그 규모가 성대했다. 그랜드 워커힐에서 일하면서 단 한 순간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던 그가 딱 한 번 위기에 봉착한 적이 있다고 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간 그는 코엑스 컨벤션센터로 파견 근무를 갔는데, 그에 따르면 그 3년이 자신의 제과인생을 통틀어 가장 힘든 시기였단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던 데다 제과 담당자로는 그가 유일했기에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워커힐에서 일할 때와 상황이 많이 달랐어요. 예를 들어 코엑스 컨벤션센터에서는 호텔보다 대중적인 제품들을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게 중점이었어요. 또 행사 경험이 없는 친구들을 제가 통솔해야 했죠. 이런저런 상황이 닥쳤을 때 상의할 사람이 없어서, 그게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무사히 복귀했어요(웃음)” 우여곡절을 겪긴 했으나 그는 케이터링을 준비하는 법이나 사람을 관리하는 부분 등에 대해 더 깊이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복귀 후 동료들의 소중함을 한 번 더 실감했고 한 편으로는 노련해졌다. ‘따로 또 같이’, 그가 호텔 셰프로 일하는 법 신만식 셰프는 유독 ‘소통’이나 ‘함께’라는 단어를 많이 언급했다. 끈기와 집중력, 지구력 등 호텔 셰프는 물론 제과제빵 기술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은 많지만 그는 그 중에서도 사람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저희는 주방 분위기가 정말 남달라요. 직원들이 서로 자율적인 의사를 존중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작업을 해요. 전 서로 함께 힘을 합치면 더 큰 것을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호텔업계가 그래요. 때론 제과부와, 때론 조리부와 같은 테이블을 짜야 하죠. 그 과정이 전 즐거워요” 어쩌면 그가 그랜드 워커힐에서 오래토록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단지 호텔에서의 일이 적성에 맞아서만은 아니었을 터다. 소통을 중시하는 그의 성향과 호텔 제과부의 모토가 일치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1993년부터 지금까지 숨 한 번 제대로 돌리지 못하고 25년을 달렸다. 언젠가는 그 또한 자신의 업장을 마련하는 꿈을 꾸지만, 그 전까지 아마 그는 그랜드 워커힐에서의 마라톤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제과제빵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지금의 절 있게 한 삶 자체와 같아요. 제 막내딸이 10살인데 얼마 전 절 쫓아 파티시에가 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또 희망인 셈이죠”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 지 예측할 수 없는 마라톤을 끝내고 완주 목걸이를 목에 걸 그날을 기다려본다. 약력 1993년 대구 풍차 제과점 근무 1994년 리치몬드 제과점 근무 1998년 세종 호텔 제과부 근무 1999~現 그랜드 워커힐 서울 부제과장 2004년 제과기능장 취득 2005년 서울 국제 빵 • 과자 경연대회(SIBA) 소형설탕공예 부문 장려상 2012년 베이커리 페어 대형초콜릿공예 부문 장려상 2014년 베이커리 페어 제 1회 마스터 베이커리 챔피언 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