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띠85도씨베이커리 송종성 셰프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 작업이 끝나고 직원들이 퇴근한 저녁, 홀로 남아 매장을 지킬 때 송종성 셰프의 하루는 다시 시작된다. 단골손님들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거나 빵을 포장하고 종종 커피를 내리기도 하는 그런 소소한 순간들이, 그는 여전히 가장 즐겁다. 36년 만에 얻은 온전한 자신의 매장. 매일 아침 ‘아띠85도씨베이커리’의 문이 열리면 경력 40여 년 노장 셰프의 시간이 느린 춤을 춘다. 취재·글 박소라 사진 이재희 즐거운 제빵사 1970년대의 제과제빵업계는 지금과 많이 다르다. 식빵이나 도넛의 판매율이 높았고, 특히 제과시장의 환경은 ‘슈를 만들 줄 알아야 일류 기술자’라고 할 만큼 미비했다. 그 시대를 거쳐 업계의 숱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제빵사의 끈을 놓지 않은 사람이 있다. 서울대입구역 근처에서 아띠85도씨베이커리라는 빵집을 운영하는 송종성 셰프가 그 주인공이다. 1978년 10월, 처음 제빵을 시작한 그의 나이는 꽃다운 열여덟. 계기는 지인의 소개였지만 앞으로의 삶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첫 직장은 망원동에 위치한 하얀풍차였다. “그 전까지는 빵을 접해본 적이 없었어요. 하얀풍차에서 ‘생도너츠’를 먹었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더라고요” 다른 이들처럼 설거지, 청소, 심부름부터 시작해 한 달이 지나 오븐을 담당했다. 선배들의 움직임을 아등바등 쫓아가느라 바빴던 1년 반의 시간을 그는 “즐거웠다”는 한 마디로 표현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제대로 된 빵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하얀풍차에서 기초를 익힌 후, 그는 서독빵집에 반죽을 담당하는 주단파로 취직해 2년을 일했으며, 천호동 빠리제과에서는 주말이로 1년 반을 일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하고 저녁 7시에 작업이 끝나면 다음날 작업할 것을 준비하는 소위 ‘저녁 일’이 밤늦도록 이어졌다. 당시는 제과점 시설과 업계 환경이 열악해 대부분의 재료를 매장에서 직접 조리했다. 팥을 쑤거나 카스텔라 반죽을 거품기로 일일이 휘핑해 만드는 등의 작업은 어느 빵집에서나 제빵사의 당연한 일 중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전기오븐이 아닌 가스오븐을 사용하는 곳이 더 많았기 때문에 눈으로 불 높이를 확인하고 손으로 온도를 느끼면서 빵 굽는 방법을 익혀야 했다. 그런 나날들이 몇 년간 지속됐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 잠깐의 짬을 내 동료들과 술을 한 잔씩 기울이다보면 그런대로 또 즐거워졌다. 그는 크고 작은 여러 빵집을 거쳐 빵부터 케이크까지 자신의 잠재력을 서서히 키워갔다. 그리고 인고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 무렵, 이대 그린하우스에 입사했다. 그린하우스는 지금도 많은 셰프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명성이 높은 곳이었다. 그 이유는 대학가에 맞춘 콘셉트에 있었다. 매장에는 독특하게도 스낵바가 있어 도넛, 크로켓, 샌드위치 등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을 만한 간식용 제품들은 물론, 당시는 생소했던 쇼트케이크나 페이스트리도 만나볼 수 있었다. 셰프는 이곳에서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던 기술들을 새로 터득했다. 그리고 5년의 시간이 지나, 그는 불광동에 위치한 태극당에 부책임자로 입사했다. 그린하우스에서 차곡차곡 쌓인 기술들은 태극당에서 일하는 1년 반 동안 빛을 발했다. 그는 그린하우스와 태극당에서 자신의 기술이 제대로 형성되었노라 고백한다. 위기는 기회로, 아띠85도씨베이커리의 탄생 태극당을 그만둔 후 불란서바게트 등의 몇몇 빵집을 전전하며 책임자 생활을 하던 그에게 1995년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친다. 그가 천호동에 처음 오픈한 빵집 ‘불랑제리’가 6개월 만에 저조한 매출로 문을 닫게 된 것이다.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만 같아 괜한 회의가 들었다. “스스로에 대한 한계가 느껴지더라고요.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나이이기도 했고요. 이런저런 복합적인 상황들이 겹쳐 결국 잠시 시간을 갖기로 했죠” 그로부터 1년여 기간 동안 그는 휴식기를 가졌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이 있었던 곳,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왔다. “딱히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빵을 그만두면 좋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동안 습관적으로 몸에 배었나 봐요. 한 번 쉬었다 와서 그런지 더 열심히 했어요” 그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오너셰프로서 도전한 것은 1999년의 일이다. 그는 원당에 토탈 베이커리 형태의 파란풍차를 오픈했다. 12평 규모의 아담한 빵집에는 그와 직원 1명이 함께 일했다. 도넛, 앙금빵, 카스텔라 같은 동네빵집에 있을 법한 메뉴들 위주였지만 매출은 그 시절에 하루 50만원씩 기록할 만큼 성황을 이뤘다. 파란 풍차가 예상보다 좋은 반응을 얻게 되자 그는 더 큰 규모의 빵집을 운영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리하여 2001년, 봉천동으로 터를 옮기고 지금의 아띠85도씨베이커리 2호점이 있는 22평짜리 가게 자리를 인수해 빵굼터를 오픈하기에 이른다. 큰 빵을 위주로 메뉴의 콘셉트도 바꾸었다. 빵굼터는 아띠85도씨베이커리로 바뀌기 전 2015년까지 14년 동안 문을 닫지 않았다. 때때로 휘청거렸지만 그럴 때면 매장을 리뉴얼하며 끝까지 빵굼터의 끈을 놓지 않았다. 리뉴얼한 횟수만 5번 정도 된단다. “메뉴도 업그레이드해보고 인테리어도 바꿔보고 하느라 벌어놓은 돈을 모두 투자했어요. 잘 안 되면 매장을 옮기면 되는데 그 생각을 못했죠. 그땐 여기서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다른 곳에 간다고 되겠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빵굼터의 매출을 올릴 여러 방법을 고안하던 중 그의 머리를 스친 것이 바로 그 무렵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건강빵이다. 그는 2014년,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빵굼터의 세컨드 브랜드 격으로 아띠85도씨베이커리라는 이름의 건강빵집을 오픈했다. ‘아띠’는 친한 친구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며, ‘85도씨’는 커피를 추출하는 가장 맛있는 온도. 즉 아띠85도씨베이커리에는 친구 같은 베이커리이자 빵과 커피를 만나볼 수 있는 베이커리 카페를 만들고 싶은 셰프의 바람이 담겨 있다. 아띠85도씨베이커리는 체인점의 형태로 전개되던 파란풍차나 빵굼터와 달리 상호부터 인테리어, 메뉴까지 그의 취향과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첫 빵집이다. 모든 제빵사의 꿈인 ‘나만의 가게’를 그는 30년이 넘어서야 갖게 된 것이다. 그만큼 아띠85도씨베이커리에 대한 그의 애착은 남다르다. 그는 매장을 오픈하는 데 누구보다 많은 신경을 쏟았다. 상호에 걸맞게 편안한 느낌을 줄 수 있도록 원목의 색상과 텍스처까지 꼼꼼히 살폈으며, 그동안의 노하우를 발휘해 재료를 엄선하고 메뉴를 구성했다. 그 결과 빵부터 케이크, 초콜릿, 잼 등 큰 제과점을 방불케 하는 80여 종의 제품들이 17평의 작은 공간에 빼곡하게 진열돼 있다. 셰프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매장에는 학생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블로그에도 숱하게 등장할 만큼 인기를 얻고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제가 생각하는 좋은 빵은 솔직한 빵이에요. 인위적인 재료나 가공된 재료를 최대한 배제하고 만든 빵이죠. 모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좋은 재료를 사용하려고 해요” 그의 재료 선택은 조금 유별나다. 그는 단순히 좋다고 알려진 재료를 사용하기보다 그 재료를 왜 사용하는지, 어떤 점이 좋은가에 대해 직접 공부하고 소비자들에게 설명한다. 르방을 예로 들면, 이스트는 안 좋은 재료, 르방은 좋은 재료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주장하는 대신 빵을 만들 때 왜 르방을 넣는 것인지에 대해 어필하는 식이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나는 재료들은 되도록 국내산을 고집하고, 완제품을 구입하기보다 직접 조리 과정을 거친 제품들을 사용한다. 이것이 그가 만드는 건강빵의 정체다. 인기에 힘입어 그는 2015년 기존의 빵굼터를 아띠85도씨베이커리 2호점으로 리뉴얼 오픈했다. 최근 2호점 일대가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과도기에 접어들었지만 2호점이 본점에 영향을 주지 않을 때까지는 계속 운영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 고비를 넘기면 빵굼터처럼 또 수년간 자리를 지켜낼 것이다. ‘아띠’가 될 빵집 송종성 셰프는 빵굼터는 물론 지금의 아띠85도씨베이커리 역시 연중무휴로 운영해왔다. 직장인들이 출근을 하기도 전인 아침 7,8시부터 밤 11시까지 아띠85도씨베이커리는 봉천동의 길을 밝힌다. 그와 비슷한 시점에 빵을 시작한 동료들은 대부분 업계에서 떠난 지 오래. 그러나 그는 가능한 한 업계에 남고 싶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전 빵집에 있는 것 자체가 좋은 것 같아요” 그에게 있어 빵집은 일터이자 쉼터이며 동시에 놀이터다. 아띠85도씨베이커리를 구상할 때 빵굼터를 놓아두고 다른 자리에 매장을 낸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워낙 한 자리에서 오래 해왔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생각하는 빵굼터의 이미지를 한 순간에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띠85도씨베이커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된 다음에 리뉴얼한 거죠” 이처럼 그의 결정에는 언제나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가 ‘셰프의 제품 제안’에 인기제품인 ‘로띠 카페’와 ‘앙버터’ 대신 ‘브리오슈’와 ‘무화과 캉파뉴’를 소개한 이유는, 브리오슈는 부드러운 식감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권장하고 싶은 제품이며, 무화과 캉파뉴는 콘셉트를 표방하는 대표 건강빵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것 하나라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꼼꼼함. 이를 두고 그는 스스로를 소심하다고 했지만 그의 그런 성향은 한편으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한 자리에서 빵집을 16년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로 작용한다. “아띠85도씨베이커리가 친구처럼 오래 남는 빵집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친구라는 게 그렇잖아요. 오래가기가 참 어려워요. 빵집도 그렇거든요. 하면 할수록 어려워요. 해야 할 게 여전히 많고요” 오픈 이래 매해 상승 가도를 달리고 있는 아띠85도씨베이커리. 경력 40여 년 노장의 파워는 작은 빵집을 큰 고래로 키워냈다. 하지만 그는 지금보다 가게가 더 번창해서 직원 복지를 늘릴 수 있는 단계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아띠85도씨베이커리의 내일에 언제나 햇살이 쨍쨍하기를, 그리하여 셰프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오랜 친구로 남을 수 있기를 응원한다. 약력 1978년 하얀풍차 근무 1980년 서독빵집 근무 1982년 빠리제과 근무 1984년 이대 그린하우스 근무 1989년 불광동 태극당 근무 1995년 불랑제리 오픈 1999년 파란풍차 오픈 2001년 빵굼터 오픈 2013년~現 아띠85도씨베이커리 오너셰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