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크 하우스 박영석 오너셰프 불굴의 제빵사 박영석 셰프의 빵집 계보는 꽤나 복잡하다. 지역을 넘나들고 이름은 수도 없이 바뀐다. 그 계보의 끝에 베이크 하우스가 있다. 베이크 하우스는 일명 부촌이라는 청담동에서 오로지 빵으로만 승부하며 13년간 자리를 지켰다. 사라져가는 동네빵집들 사이에서 베이크 하우스가 흔들림 없이 버텨내고, 박영석 셰프가 제빵사로서 본분을 다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도 아닌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굳센 의지다. 취재•글 박소라 사진 이재희 고마운 동네빵집, 베이크 하우스 베이크 하우스는 박영석 셰프의 첫 빵집이 아니다. 그는 베이크 하우스의 시작을 말하기에 앞서 많은 빵집들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시간에 젖어 어느덧 낡고 닳은 14년차 빵집은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는지 모를 제빵사 인생에서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그는 어떻게 그 오랜 시간 흔들리거나 주저앉지 않았을까. 심지어 오픈 후 3년간 몇 억원에 달하는 흑자를 보았을 때도 그는 오히려 자신을 다독이고 채찍질했다. “제 기술 스승은 주민들과 아이들이에요. 지역 특성상 건강에 관심이 많거나 입맛이 까다로운 아이 엄마들이 많죠. 10세 이전의 아이들은 정말 솔직해요. 빵이 맛없으면 그 자리에서 거부하고 맛있으면 멀리서도 엄마 손을 잡고 찾아와요. 그러니 그들의 입맛에 맞는 빵을 만들려면 제가 더 노력할 수밖에 없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역시 단순히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좋아하면서 속이 편한 빵이 정말 좋은 빵이라고 믿는다. 이를 위해 영양강화밀가루를 사용하고 르방과 천연발효종을 고집한다. 먹고 나서 소화가 잘되고 시간이 지나도 노화가 덜 되며 수분이 많은 빵. 나아가 모양만 빵이 아니라 진정으로 빵다운 빵. 이것이 그가 오랜 시간 동네 한가운데에서 빵집을 운영하면서 터득한 ‘좋은 빵의 진실’이며, 베이크 하우스를 청담동 동네빵집으로 지켜낸 비결이다. 셰프는 재작년 본점과 가까운 삼성동에 2호점을 오픈했다. 2호점을 열기로 결심한 이유는 본점이 위치한 동네의 재건축이 시작되면 매장을 정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2호점의 이름은 더 베이크 하우스. 오래된 아파트 앞에 있어 중장년층 손님이 더 많은 본점과 달리 2호점은 젊은층 손님들이 많다. 2년이 흐른 현재 재건축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덕분에 2개의 매장을 운영하느라 벅찰 때도 있지만 다행히 본점은 본점대로, 2호점은 2호점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순탄하게 직진하고 있다. 제과제빵에 매료되다 박영석 셰프가 지금의 핑크빛 인생을 맞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누나다. 그의 인생은 스무살 때 바뀌었다. 6남매 중 막내로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0살 때 어머니를 여읜 그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누구의 도움 없이 살아남아야 했던 그의 인생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온 것은 1980년. 그는 누나의 권유로 제과제빵을 시작했다. “시골에서 제빵사는 남자가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치부됐으니까 저도 별 뜻이 없었어요. 당시 제 누나가 서교동에서 미용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저를 서울로 부르더라고요” 영문도 모른 채 상경한 그는 누나의 도움으로 돌연 빵집에 취직하게 됐다. 다행히 서울에서 제빵사는 전망 좋은 직업이었다. 더구나 숙식이 제공되고 돈까지 벌 수 있으니 떠돌이 생활을 했던 그에게는 제법 만족스러운 직장이었다. 그는 영동시장에 위치한 로열제과에서 처음 일을 배웠다. 빵집 현장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기에 시키는 대로 새벽까지 철판을 닦고 팥을 끓였다. 그런 일과가 반복된 지 4일째 되던 날, 옷가지를 챙기러 겨우 집으로 갈 수 있었다고. “나중에 들었는데 그때 직원들이 내기를 했대요. 제가 다시 돌아올 것인가, 그대로 도망갈 것인가. 워낙 힘든 일인 데다 제가 체구가 작으니까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나 봐요. 그런데 3시간 만에 진짜로 옷을 들고 갔어요” 그는 마치 사랑에 빠지듯 제빵사의 일에 매료됐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잡일하고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몰래 팥 앙금 같은 걸 훔쳐 먹거든요(웃음). 그런데 전 배고플 때마다 버터 크림을 먹었어요. 케이크를 한 입 먹고 나선 정말 뿅 가는 줄 알았죠. 그 기억이 제 머릿속에 인상적으로 남은 것 같아요” 초창기에는 매일 손에 행주를 들고 다녔다. 청소하는 시간에 행여나 선배들이 크림을 끓이고 반죽을 하는 모습을 놓칠까봐 한시도 쉬지 않았단다. 먹고 살기 힘들어 시작한 일은 어느새 천직이 되어 있었다. 열정적으로 임하다보니 남들보다 빨리 오븐 다루는 법을 배울 수 있었는데, 그후부터는 퇴근 후 혼자 남아 다음 날 판매할 제품들을 만들어 놓곤 했다. 그에게는 이것이 곧 연습이고 공부였다. 1년이 지나 다음 직장으로 이직할 무렵의 그는 이미 전보다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두 번째 직장은 남영동에 위치한 모란제과. 그는 모란제과에 입사하고부터 본격적인 기술자의 길을 걷게 됐다고 했다. 모란제과는 故김충복 명장이 운영하던 곳으로 셰프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다. 당시 공장장은 한국제과학교 3기 졸업생이었는데, 그는 그 영향을 받아 한국제과학교에 들어가 이론을 배우기도 하고 치즈케이크, 머랭 과자, 마지팬, 앙금 꽃 같은 고급 기술도 습득했다. 스스로도 혀를 내두르는 연습벌레인 그는 3년간 일한 모란제과를 그만둔 후부터 경기도 광주에 첫 빵집을 오픈하기 전까지 책임자 생활을 했다. 10년이 지나지 않아 책임자의 단계까지 성장했으니 그의 연습량이 얼마나 많았을지 알 만하다. 4전 5기의 도전 1987년 박영석 셰프는 경기도 광주에 첫 번째 빵집인 ‘엔제과’를 오픈했다. 12평 규모의 작은 빵집이지만 작업실을 오픈 키친 형태로 갖추고 토탈 베이커리 콘셉트로 다양한 빵과 디저트를 마련했다. 그때만 해도 오픈 키친은 획기적이었는데, 그가 주방을 전면 개방한 데는 이유가 있다. “주방이 손님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 위생에 대해 저도 모르게 해이해지더라고요” 이를테면 오너셰프로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선택한 방책. 지금까지도 그는 오픈 키친을 고집한다. 오너셰프로서의 시작은 제법 성공적이었다. 평균 1,000원이던 팥빵을 1,200원에 판매했어도, 손님들은 그의 팥빵을 알아주었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 엔제과는 샹도르과자점, 그리고 쉘부르과자점으로 두 번 바뀌면서 광주의 동네빵집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위기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도전이라는 명목 하에 구리 신도시로 이전한 것이 화근이었다. 1997년 9월 야심차게 매장을 이전한 그를 덮친 것은 그해 11월에 터진 IMF. 전국적인 경제위기 앞에서 그 역시 버텨낼 방도가 없었다. 2년 동안 날린 돈만 정확히 4억이었단다. 그는 주머니에 10원짜리 동전 하나 없는 빈털터리 상태로 광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운명처럼 다시 빵집을 열었다. 첫 가게를 오픈한 1987년부터 서울 청담동으로 이전해 다섯 번째로 문을 연 베이크 하우스가 안정기에 접어든 2008년까지 20년간 셰프의 인생 그래프는 심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제빵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만큼 스스로에게, 그가 만든 빵에 자신이 있었다. 언젠가는, 누군가는 내 빵을 알아주리라. 그것 하나만을 믿고 오뚜기처럼 일어나 매일 아침 가게 문을 열었다. 다시 쓰는 ‘제빵사 박영석’의 역사 박영석 셰프는 지난해 11월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로 위촉됐다. 산업현장교수는 산업현장에서 10년 이상 경력을 쌓은 숙련기술인들이 학교 및 중소기업에 기술을 전수하는 제도로 2012년부터 실시돼왔다. 산업현장교수로 지정되면 1년에 500시간의 교육을 이수해야 하며 3년에 한 번씩 성과를 검토해 재지정을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남 서초지회장이었던 그는 현재 기능장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대한민국기능올림픽 국가대표 제과 코치를 맡고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대안학교나 교도소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때론 기능장 시험을 감독하기도 한다. 때때로 숨이 가쁠 만큼 바쁘지만, 그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셰프는 자신이 차곡차곡 쌓아 완성한 결과물들에 대해 ‘하다 보니 어느새 이 자리에 올라와 있었다’고 너무나도 가볍게 정리했다. 간혹 후배들이 빵 혹은 제빵사라는 직업을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모습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전 후배들에게 스스로 무언가 되겠다는 생각부터 하지 말라고 해요. 꿈을 갖는 건 물론 좋지만 무언가가 되기 위해 빵을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빵을 좋아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신도 모르게 원하는 목표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어요” 진정으로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일까. 그는 여전히 현장에 있는 것이 익숙하고 편하다. 특히 산업현장교수가 된 지금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함께 있는 시간들이 즐겁단다. “맛있다”는 손님의 한마디가 그의 손을 움직인 것처럼, “언제 다시 오세요?”라는 학생들의 한 마디는 바쁜 와중에도 발걸음을 움직인다. “저는 ‘빵집 아저씨’, ‘빵쟁이’라는 단어가 참 듣기 좋아요. 실제로 빵집 아저씨 맞잖아요. 요즘은 셰프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사실 아직 어색해요(웃음)” ‘특기는 빵을 만드는 것, 취미는 빵을 파는 것’이라는 56세 빵집 아저씨 인생에 늦은 때는 없다. 2017년, 또 하나의 별이 박영석 셰프의 마음에 뜨고 있다. 약력 1980년 로열제과 근무 1981년 모란제과 근무 1984년 롯데제과 근무 1986년 몽블랑 근무 1987년 엔제과 오픈 1990년 샹도르과자점 오픈 1996년 쉘부르과자점 오픈 1997년 케익 이벤트 오픈 2005년~現 베이크 하우스 오너셰프 2010년 대한민국제과기능장 취득 2015년 우수숙련기술인 선정 2016년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 위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