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Young Il 더 브래드 팬트리 김영일 오너셰프 스스로 개척한 길 김영일 셰프의 이력은 조금 독특하다. 그는 윈도 베이커리와 대기업 R&D, 프랜차이즈 빵집을 넘나들며 훗날 자신이 오픈할 빵집에 대한 밑그림을 조금씩 그려왔다. 그렇게 완성된 ‘더 브래드 팬트리’는 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취재 • 글 박소라 사진 이재희 상암동 골목은 MBC 방송국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상권이 형성됐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아스팔트도 제대로 깔려 있지 않은 옛날 동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동네에 ‘더 브래드 팬트리’는 터를 잡았다. 브래드 팬트리에 이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가게들이 지금은 골목골목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브래드 팬트리는 일본의 동네빵집을 연상시킨다. 나무로 된 빵 진열대는 책장처럼 디자인되어 매장 한가운데서 위용을 뽐낸다. 브레드 팬트리에 관한 숱한 온라인 게시글에는 바로 이 빵 진열대가 마스코트처럼 등장한다. 브래드 팬트리의 마스코트는 주방에도 있다. 하얀 셰프복에 짙은 녹색 빵 모자와 줄무늬 앞치마를 입고 새벽부터 나와 빵을 굽는 김영일 셰프다. 빵 진열대 틈으로 뒤쪽 주방에서 일을 하는 셰프의 모습이 보인다. 진열대 위에 줄 맞춰 진열된 작고 반듯한 빵들은 가만 보니 셰프의 섬세한 손놀림에서 탄생된 것이었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김영일 셰프가 제빵사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97년. 당시 그는 영남대학교 4학년생이었다. 제과제빵과는 전혀 무관한 생화학 전공을 했고, 당연히 제빵사를 꿈꿔 본 적도 없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본래 기독교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카페를 운영하고 싶었단다. 그러나 카페만으로는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는 생각에 부수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빵으로 눈을 돌린 것이 시작이 됐다. 그는 제과제빵학원에서 6개월간 공부하고 자격증을 딴 후 수순대로 윈도 베이커리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대구의 동네빵집 2곳에서 보낸 시간이 무려 5년. 학원에서 글로 배운 제과제빵의 기본적인 기술들을 웬만큼은 익힐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그의 정신을 쏙 빼놓은 것이 하나 있다. “그때만 해도 대구는 생크림케이크가 대세였는데 전 계속 무스케이크만 끌렸어요. 생크림케이크와 질감부터 다르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어떤 맛일까 늘 궁금했거든요. 잡지에 나오는 레시피를 보고 무작정 따라해 보긴 했는데, ‘내가 지금 제대로 만든 걸까’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스쳤죠. 어느 순간부터는 무스케이크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지더라고요” 마침 쉴 새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스스로의 삶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찰나에 기술에 대한 욕심까지 더해지니 진퇴양난이었다. 그런 그의 인생에서 ‘에꼴 르노뜨르’는 첫 번째 전환점이 됐다. “잡지에서 에꼴 르노뜨르 1기 모집 광고를 봤어요. 그 길로 바로 상경을 했죠” 에꼴 르노뜨르 하나만을 보고 대구에서 서울로 주소지를 옮긴 그는 그렇게 원하던 무스케이크를 만들었다. 동네빵집에서 매일같이 빚던 앙금 빵이나 찹쌀떡 대신 바게트와 같은 프랑스 정통 빵도 구웠다. 인생을 바꾼 선택 에꼴 르노뜨르를 졸업한 김영일 셰프는 다소 파격적인 선택을 한다. 윈도 베이커리의 입사 제의를 거절하고 SPC에 들어간 것이다. 처음에는 파운드케이크, 마카롱, 피낭시에 등 선물류 파트 공장에서 근무를 했다. “프랜차이즈 빵집에 대한 안 좋은 인식들이 있잖아요. 윈도 베이커리와 어떻게 다른지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공장이니까 대량 생산 시스템인데 모든 기술자들이 수작업으로 제품을 생산하더라고요. 한 예로 마카롱의 경우 프랑스 셰프가 직접 세팅을 해주는데 한 번 만들 때마다 통아몬드를 일일이 간 다음 분당과 섞어서 사용하는 거예요.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죠(웃음)” 빠르고 정확한 동작, 체계적인 운영체계는 프랜차이즈 빵집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요인이 됐다. 공장에서 제품 개발실로 부서 이동을 하고나서, 그는 눈에 띄게 성장한다. 당시 SPC의 제품 개발실은 파리바게뜨 연구소와 르노뜨르 직영 브랜드 파리크라상 연구소로 나뉘어 있었다. 그는 이중 르노뜨르 직영 브랜드 파리크라상 연구소 소속이었다. 연구소는 다시 케이크, 빵, 샌드위치 파트로 나뉘었고 외국 셰프들과 함께 일했다. “윈도 베이커리에서 배운 것들이 많이 도움이 됐어요. 한 번은 제 옆에 있는 프랑스인 제빵 셰프에게 찹쌀떡, 팥빵, 식빵 등 한국의 동네빵집 제품들을 소개해 줬는데 너무 신기해하는 거예요. 레시피를 적고 사진도 찍고 하더니 그가 갑자기 모아놓은 레시피를 제게 다 보여줬어요. 덕분에 저도 프랑스 빵 기술을 많이 습득할 수 있었죠. 나중에 르노뜨르와 계약이 끝나고 그 셰프가 프랑스에 매장을 냈거든요. 그때 제가 알려줬던 레시피를 응용해 프랑스에 없는 제품들을 선보였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함께 일하는 프랑스인 셰프들과 서로의 레시피를 주고받으며 공부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기만 했다. 그의 남다른 행보는 프랜차이즈 빵집에 이어 호텔로 향했다. SPC를 그만둔 그는 이랜드가 전개하는 여의도 켄싱턴 호텔의 제과장으로 부임했다. 헌데 호텔 주방은 상상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SPC는 철저하게 분업화되어 있어서 제가 맡은 분야만 잘 하면 되는데 여긴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다 해야 했어요. 이랜드에서도 호텔 사업은 초창기라 시스템 자체가 없었거든요” 그러던 중 외식사업부가 베이커리 사업을 시작한다는 소식에 부서를 옮겼다. 이랜드 외식사업부에는 당시만 해도 적자로 운영위기를 겪고 있던 애슐리가 있었다. 애슐리는 적자 회복을 위해 베이커리 파트를 신설하고 디저트 메뉴의 개발을 진행 중이었다. 그는 베이커리 론칭 전까지 우연히 합류하게 된 애슐리에서 생각지도 못한 성과를 이뤄냈다. 대히트한 애슐리 치즈케이크를 개발한 장본인, 그가 바로 김영일 셰프다. “뷔페에서 제공되는 디저트니까 가성비가 좋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어요. 풍미가 진한 뉴욕 치즈케이크가 소비자들에게 저렴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심어줬던 것 같아요” 그가 개발한 치즈케이크는 애슐리 전 매장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랜드는 ‘뺑 드 프랑스’라는 베이커리 브랜드를 론칭했다. 그는 애슐리의 일을 마무리하고 다시 뺑 드 프랑스를 담당했다. 뺑 드 프랑스는 저가형 프랜차이즈 베이커리 브랜드로, 냉동 반죽과 즉석 반죽을 병용해 빵을 구웠다. 이랜드가 까르푸를 인수하면서 뺑 드 프랑스가 홈에버로 입점하게 됐는데, 갑작스런 매장 수의 증가로 인해 그는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고 한다. “일주일에 매장을 2곳씩 오픈했어요. 재료부터 메뉴, 주방의 동선, 인테리어까지 관여를 하다 보니 빵집 오픈에 관한 노하우가 쌓이더라고요” 그는 이랜드에서 8년을 근무했다.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이라는 점에서 보면 SPC와 이랜드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그가 2곳에서 배운 것은 전혀 달랐다. “SPC에서는 주로 제과제빵 기술을 익혔어요. 물론 제가 입사한 타이밍이 운 좋게도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되기 전이라 가능한 일이었겠지만요. 반대로 이랜드에서는 오너셰프로서 필요한 자질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때 인연을 맺었던 제과제빵 관련 업체 사람들과 아직도 연락을 하고 있어요. 실제로 더 브래드 팬트리를 오픈할 때 많은 도움을 받았죠” 브래드 팬트리의 미래를 위하여 김영일 셰프는 처음 제과제빵을 시작할 때부터 큰 그림을 그렸다. 마흔 무렵까지 회사 생활을 하고 내 매장을 오픈하리라. 2013년 마흔이 조금 넘어 오픈한 ‘더 브래드 팬트리’는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게 순항 중이다. ‘더 브래드 팬트리’라는 이름은 빵을 뜻하는 영어 브래드에 미국 가정의 식품 창고를 의미하는 ‘팬트리’를 합성한 것이다. 그가 브래드 팬트리의 모습으로 염두에 둔 것은 내추럴한 빵집이었다. “내추럴하다는 것은 무언가를 첨가하는 게 아니라 빼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최대한 첨가물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해요” 재료 역시 합천 우리밀단지의 순도 100% 우리밀, 한국 마루비시의 고품질 밀가루 등 가급적 가공되지 않고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것을 선호한다. 신선한 재료를 사용해 단순한 레시피로 만드는 빵. 브래드 팬트리를 상암동의 숨은 강자로 끌어올린 비밀은 바로 이 빵들에 있다. 그가 빵을 시작한 것은 분명 적성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빵은 꿈을 이루기 위한 곁다리였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아직 제빵사의 길을 걷고 있다. “적성에 맞다기보다는 빵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제빵사가 된 거였죠. 금방 배워서 제가 꿈꾸던 기독교 음악을 기반으로 한 카페를 낼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루하루 공부하다보니 직업관이 바뀌고 저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베이커의 삶을 살고 있더라고요” 하지만 브래드 팬트리에서 흘러나오는 CCM 음악을 생각해보면 우선순위가 바뀌었을 뿐 꿈은 이미 이룬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그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브래드 팬트리의 미래를 구상한다. “제 건물에서 자유롭게 빵집을 운영하고 싶어요. 이를테면 영화 ‘해피해피브레드’에서처럼 펜션 같은 건물에 숙식 공간과 베이커리 카페 공간을 마련하는 거죠. 때론 자본이 부족한 친구들에게 공연 장소를 제공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오랫동안 꾸준하고 편안한 빵집이 되었으면 해요” 빵집에 숙박 시설과 공연 장소라니, 역시 김영일 셰프답다. 제빵사로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된 순간을 물었을 때 그는 “매일 아침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좋다”고 했다. 남들과는 다른 그의 선택들이 늘 좋은 결과를 가져온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에 감사하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