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 Deog Ho 디종 베이커리 한덕호 오너셰프 매 순간 진화하는 제빵사 한덕호 셰프는 애초 요리사나 제빵사를 꿈꾸던 사람은 아니었다. 우연찮게 한번 시작한 일이 또 우연찮게 적성에 잘 맞아 지금에 이르렀다. 대신 그는 제과제빵 일을 하면서 하나씩 자신만의 꿈을 꿨다. 대학을 다니는 것, 학원 강사가 되는 것, 해외 유학을 가는 것, 매장을 내는 것. 그리고 꿈이 하나씩 실현될 때마다 또 하나의 꿈이 생겼다. 그가 이룬 모든 것들은 그 꿈의 해피엔딩이다. 취재 • 글 박소라 사진 이재희 될성부른 떡잎 한덕호 셰프는 초등학생 무렵부터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을 즐겼다. 어쩌면 그는 일찍부터 제빵사가 될 조짐을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빵사라는 직업이 각광받지 못한 시대에 태어난 그는 자신의 적성을 제빵사와 연결 짓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입시에 낙방한 그를 제과제빵 학원으로 이끈 것은 그의 어머니다. “마침 텔레비전에서 제과제빵 학원이 나왔어요. 어머니가 제과제빵 학원에 다녀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죠” 너무도 터무니없는 계기였지만 그 작은 우연이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1991년, 그는 신사동에 자리했던 대한제과학원에서 제과제빵을 배우고 1년 후에 군대에 입대했다. 하지만 군대 제대 후 그는 제과제빵이 아닌 촬영 감독의 길로 들어선다. “전부터 촬영 감독을 꿈꿨었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제가 감각이 없더라고요(웃음). 6개월 하다가 제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다시 제과제빵업계로 돌아왔죠” 그렇게 돌고 돌아 정착한 때가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는 그때부터 현장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잠실에 위치한 빵집 ‘샤르망’을 비롯해 8년간 여러 윈도 베이커리를 전전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 무렵 제과제빵업계는 마음이 잘 맞고 기술이 뛰어난 공장장을 따라 근무지를 옮겨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역시 샤르망의 공장장을 쫓아 3,4년간 이곳저곳을 다녔다. 그후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한 윈도 베이커리의 공장장이 되어 일을 하던 중 문득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결국 그는 2년제인 안산공업대학(현 신안산대학교)의 호텔외식학과 야간 대학에 입학했다. “학비를 벌어야 하니까 낮에는 근처 빵집에서 일하고 밤에는 대학에서 공부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 그 시절이 가장 행복하지 않았나 싶어요” 일하랴 공부하랴 어느 때보다 바빴지만 젊은 패기로 무언가에 몰두하며 현실에 대한 걱정 없이 성장할 수 있었던 그 시기가 그에게는 가장 값지고 보람된 순간이었다. 강사로서 그가 얻은 것 서른 살 무렵, 대학을 졸업한 그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다. 파리바게뜨(현 SPC) 교육팀 강사로 취직한 것이다.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춘 회사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제과제빵 현장 일이라는 게 물론 나름대로 장점이 있지만 사실 이론적인 부분들을 제대로 공부할 만한 환경은 아니에요. PC 같은 실무를 배울 일도 없고요. 기본 지식을 쌓고 싶기도 했고 가르치는 일을 해보고도 싶었어요. 처음에는 남들 앞에 나서서 강의를 할 수 있을까 걱정됐는데 한번 도전해보자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그는 교육팀 강사로 일하면서 사내 직원 교육 및 외부인 교육, 전문가 과정, 무스 혹은 초콜릿 과정 등 분야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수업을 도맡았다. 이때 오히려 전보다 더 다양한 제과 기술을 습득했다고 고백했다. 초콜릿, 타르트, 무스케이크 등 그 당시 자영 제과점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최신 품목들을 강사라는 자격 덕분에 누구보다 먼저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얄팍하게 쌓아왔던 지식이 두터워졌다’고. 더욱이 회사에서 지원해준 에꼴 르노뜨르를 다니면서 그의 실력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에꼴 르노뜨르를 다니던 때 역시 그의 인생에서 잊지 못할 시간들이다. “에꼴 르노뜨르에서 배운 것들을 실제 현장에서 그대로 선보이기란 사실 불가능해요. 하지만 대신 현장에서 그 기술들을 잘 활용하고 어떤 것도 해낼 수 있게끔 밑거름이 되어 주죠. 기술자가 훌륭한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정말 좋은 기회고 행복이에요” 설탕 공예에 흥미가 생기면서 2,3년간은 설탕 공예에만 집중한 적도 있었다. 그 결과 그는 Siba와 같은 여러 대회에서 상을 거머쥐었다. 또한 성명주 셰프를 비롯해 좋은 롤 모델과 동료들을 그 시절에 만났다고 회상했다. 기술자로서 기술을 제대로 마음껏 배울 수 있는 환경. 바로 그 환경이 조성돼 있다는 것이 회사의 장점이며, 그를 10년간 같은 직장에서 일하게 만든 요소였다. 위기를 기회로, 중국 유학을 가다 마흔이 다가오면서 그는 잘 다니던 직장을 뒤로 하고 남자라면 한 번쯤 꿈꾼다는 사업에 도전한다. 그는 용인시 구성에 위치한 13평짜리 작은 빵집 ‘쎄트레봉’을 인수해 리뉴얼 오픈했다. 불어로 ‘아주 맛있다(C’est très bon)’는 뜻을 지닌 쎄트레봉은 그의 첫 가게였다. 매장에는 그가 그동안 쌓아온 기술을 바탕으로 만든 빵과 케이크가 다채롭게 진열됐다. 그러나 작은 빵집이 외진 동네에서 골리앗 같은 프랜차이즈 빵집과 싸워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 우선 사람을 구하는 일부터 힘들었다고. 그는 이 시기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로 꼽았다. 매출이 하락세를 보이고 점점 지쳐갈 무렵, 그에게 가뭄에 단비 같은 기회가 찾아온다. 중국에서 제품 컨설팅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그는 야심차게 오픈한 첫 가게를 정리하고 중국으로 건너가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제과제빵 시장의 발전이 미비한 중국에서 일을 한다는 것에 걱정이 앞섰지만 이내 해외 유학의 꿈을 중국에서 실현하기로 결심했단다. 중국의 대형 프랜차이즈 제과업체인 ‘메일홍’에 연구소장으로 입사한 그가 맡은 일은 제품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 1년 6개월의 기간 동안 그는 중국 내에 400여 개의 매장을 둔 프랜차이즈 제과점의 제품을 업그레이드시켰다. 뿐만 아니라 냉동 반죽을 생산하고 파리바게뜨 강사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실도 신설했다. 그후 중국 향주에 위치한 제과점 ‘비비 베이커리’의 컨설팅을 마치고 3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기본을 지켜 만든 빵의 저력 한덕호 셰프가 용인시 수지구에 ‘디종 베이커리’를 오픈한 것은 2015년의 일이다. 현재 디종 베이커리 1호점은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에, 2호점은 풍덕천동에 자리하고 있다. 1호점은 건강빵을 위주로 메뉴를 구성한 9평짜리 매장인데, 오픈과 동시에 꾸준히 성장해 주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2호점에서는 가짓수를 늘려 건강빵은 물론 페이스트리, 단과자빵, 식빵, 구움과자, 케이크류까지 모두 마련했다. 쫄깃한 크럼과 부재료의 식감이 조화로운 하드계열 빵들과 촉촉하면서 큼지막한 스콘은 디종 베이커리의 대표제품. 이와 함께 식사 대용으로 좋은 샌드위치 제품들과 홀케이크의 수요가 높다. 1,2호점의 상승가도에 힘입어 그는 언젠가 3호점을 오픈할 계획을 갖고 있다. 3호점은 강사의 경력을 살려 공방으로 활용할 생각이란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겪은 경험들을 기반으로 지금의 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윈도 베이커리에서 눈코 뜰 새 없이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강사가 되었으며, 강사로서 익힌 기술을 살려 중국 유학을 다녀올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첫 가게의 쓴 실패는 두 번째 가게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단단한 발판이 되어주었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훗날 그에게 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를 지금보다 더욱 성장시킬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취재를 마친 후 그가 정성스럽게 내어준 촬영용 하드계열 빵 몇 가지를 직원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었다. 빵은 커팅한지 시간이 조금 지났음에도 크럼과 부재료가 입 안에서 겉돌지 않고 마치 밥을 먹는 것처럼 속이 더부룩하지도 않았다. 빵을 맛본 다른 직원들의 생각도 똑같았다. 손바닥만 한 빵 한 조각은 직원들로 하여금 디종 베이커리와 한덕호 셰프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저는 빵을 급하게 만들지 않아요. 각 공정마다 온도와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죠. 2차 발효도 1시간 30분씩 하고 있어요. 이렇게 모든 공정을 지키다보면 빵 하나를 만드는 데 오래 걸리지만 최대한 정직하게 기본을 지켜서 만들려고 해요” 그가 빵을 만들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은 역시나 기본이다. 많은 셰프들이 한결같이 기본을 논한다. 하지만 그의 빵에 담긴 기본은 어딘가 달라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