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당 돈암점 최문섭 셰프 보이지 않는 한계를 뛰어넘다 태극당 돈암점 최문섭 셰프는 동경제과학교로 유학을 떠나며 ‘하나라도 얻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노라’ 하는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유학 생활이 녹록지 않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떠나기 전보다 훨씬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한국 땅을 밟았다.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이뤄가는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멋진지를 보여주고 있다. 취재‧글 구명주 사진 이재희 축구선수, 제과제빵을 만나다 최문섭 셰프는 제과제빵을 시작한 뒤 한눈을 판 적이 없다. 일본으로 유학을 갔을 때도 동경제과학교와 제과점을 오가며 묵묵히 학업과 일을 병행했고, 태극당 돈암점에서는 10년 가까이 근속 근무하고 있다. 10대, 20대의 셰프는 지금과 달랐다. 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정작 무엇 하나 끝까지 해내는 법이 없었다. “불합리한 일을 당하면 눈 뜨고 못 보는 성격이에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곤 했죠” 대표적으로 중학교 2학년 무렵, 그는 축구부를 뛰쳐나왔다. 체육고등학교로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축구부의 권위적인 문화에 질려버린 터였다. 축구선수를 포기한 그는 운동장을 등지고 교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자인회사에 취업했지만 축구를 관뒀듯이 디자인 일도 얼마 못 가 손에서 놓고 만다. 백수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다 보니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어머니의 눈총도 따가웠다. 집을 나와 최문섭 셰프가 찾아간 곳은 당시 막 문을 열었던 한미제과제빵학원이었다. 학원에서 제품을 만드는 동안 그는 숨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학원은 그에게 도피처였다. 어릴 적 꿈은 ‘셰프’가 아니었지만 그는 셰프가 될 운명을 받아들인다. 학원에서 배운 기술을 토대로 회기동 크로네베이커리에서 현장 경력을 쌓았고, 한미제과제빵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강사로 살던 어느 날, 벽이 하나 보였다. ‘지금 이대로 산다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없겠구나’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스친 건 ‘유학’이라는 카드였다. 일본으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선 그를 말렸다. “다들 만류했지만 어머니, 사촌 누나, 한미제과제빵학원 김영선 원장님 세 사람은 떠나라고 격려하더군요. 당시 사촌 누나가 이런 말을 했어요. 지금 편하면 10년이 힘들 테고, 10년을 고생하면 남은 인생이 행복할 거라고요” 학교와 일터를 오가며 버틴 일본생활 동경제과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시작한 타국 생활은 막막하기만 했다. 당장 일본어가 문제였다. 그의 일본어 실력은 히라가나를 더듬더듬 읽는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최소 1년간은 어학에 매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3개월치의 어학원비와 방세를 한국에서 미리 치른 그는 생활비 100만원만 들고서 비행기에 올랐다. 그의 손에는 왕복티켓이 아닌 편도티켓이 들려 있었다. ‘스스로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면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생활비는 3개월 즈음 바닥을 드러냈고, 설상가상으로 아르바이트 일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말도 잘 못 하는 그를 자그마한 라면가게의 젊은 사장은 믿고 받아줬다. 그러나 갑자기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하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제과를 배우러 일본에 온 건 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커진 거죠”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자 그는 ‘Bonbon’이라는 동네 제과점에서 ‘초콜릿 케이크’를 사 먹는다. 케이크의 맛에 반한 최 셰프는 4~5개월간 케이크를 먹으러 제과점을 찾았다. 제과점을 몇 달간 드나든 궁극적인 이유는 제과점 취업이었다. 그는 60대 할아버지 오너셰프에게 간곡하게 “제과점에서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안 된다’고 고개를 젓던 봉봉의 셰프는 한국에서 온 낯선 청년의 집념에 마음을 빼앗긴다. 봉봉에 취직한 최문섭 셰프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수년간 일했다. 동경제과학교에 입학한 건 일본에 간 지 1년이 지났을 즈음이다. “솔직히 처음 몇 달은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고작 케이크 시트를 만들려고 멀리까지 왔나’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진지하게 기초부터 다시 기술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한국에서 온 ‘경력자’라는 타이틀 때문이라도 허투루 수업을 들을 수 없었다. 오후 4시 30분, 학교 수업이 끝나면 최 셰프는 제과점으로 달려가 셰프복으로 갈아입었다. 그야말로 집, 학교, 제과점을 반복하는 정형화된 삶 그 자체였다. 심지어 제과점을 쉬는 날이면 아르바이트를 했던 라면 가게에서 일손을 돕기도 했으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랐다. “2010년경, 일본에서 급한 연락이 왔어요. 봉봉 제과점의 셰프가 돌아가셨다고요. 일본으로 바로 달려갔죠. 그때 셰프의 두 아들이 ‘아버지가 떠난 제과점을 최 셰프가 대리 경영해 달라’고 청을 하더군요” 그는 일본으로 다시 갈까 말까를 놓고 망설였지만, 태극당 돈암점에 남기로 했다. 주 5일제를 실현한 태극당 돈암점 최문섭 셰프가 태극당 돈암점과 연을 맺은 시기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던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생산부장으로 갓 부임한 최 셰프는 신제품을 내놓는 데 욕심을 냈다. 신제품 시식행사를 하면 ‘예쁘다, 맛있다’는 찬사가 이어졌지만 정작 손님들이 사가는 제품은 신제품이 아니었다. 셰프는 스스로 고집을 꺾었다. “기존 제품보다 신제품이 비싸다 보니 손님들이 사질 않더라고요. 아무리 훌륭한 제품도 손님이 외면하면 소용없죠. 잘 팔리는 제품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최소한의 재료로 최고의 맛을 끌어낼 수 있도록 레시피를 보완하는 데 오랜 시간을 썼죠” 레시피를 수정해 완성한 ‘치즈케이크’와 ‘키리쉬 케이크’는 태극당의 효자상품이 됐다. 태극당 돈암점은 2009년과 2012년 큰 전환점을 맞는다. 2009년에는 애매하게 분리돼 있었던 공장을 합치는 리모델링을 거쳤으며, 2012년에는 1월 1일자로 주 5일제를 시작했다. 심지어 오후 4시 30분이면 태극당 공장의 전등은 일제히 꺼진다. 합의한 만큼만 빵을 생산하고, 집으로 돌아가 오후 시간을 즐기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보수화되기 마련이건만 일흔을 내다보는 태극당은 오히려 과감하게 혁신하고 있었다. “주 5일제를 제안했을 때, ‘매출이 줄어들면 어쩌나, 인건비가 더 들면 어쩌나’ 우려하는 목소리도 컸죠.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주 5일제에 맞는 프로세스를 정비했죠, 셰프들의 생각도 꾸준히 바꿔나갔습니다” 최 셰프는 ‘잘 쉬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동료 셰프를 위해 주 5일제를 정착시켰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일주일에 6일을 일한다. 대신 틈만 나면 그는 여행으로 재충전하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는 강릉. 한 달에 많게는 2~3번 정도 강릉에서 시간을 보낸단다. “여행지에서는 시간이 느릿느릿 흐르잖아요. 모든 게 좋아요.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대관령에 들러 하염없이 앉아 있기도 하죠” 인생의 버킷리스트, 5가지를 이루다 2000년 초반 셰프는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7가지 세웠다. 그가 일찌감치 이룬 4가지 꿈은 ‘해외로 유학가기’, ‘제과기능장 되기’, ‘대학 강단에 서기’,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다. 일본에서 제과를 배웠고, 2009년엔 제과기능장이 됐으며 한국관광대학교에서 제과제빵을 가르쳤다. 또래 친구들보다 늦게 결혼하긴 했어도 지금은 귀여운 두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후회로 얼룩진 삶을 살 때, 그는 구체적인 꿈을 꾸며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올해도 버킷리스트 하나를 이뤘다. “나만의 공방을 갖는 게 소원이었는데 4월 초에 태극당에서 가까운 거리에 작업실을 마련했어요. 여기서 베이킹 클래스를 열 계획입니다” 셰프는 공방을 찾는 손님들에게 빵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을 알려주고 싶다. “보통 ‘천연발효종은 좋고, 이스트는 무조건 나쁘다’, ‘글루텐은 몸에 해롭다’고 오해해요. 클래스를 통해 잘못된 오해를 풀어 줘야죠. 작업실이 필요한 사람에겐 공간을 대여해줄 수도 있고요. 태극당 일은 태극당 일대로 열심히 하고 공방은 공방대로 운영할 생각입니다” 누군가에게 꿈을 말하면 그 꿈이 이뤄질 확률은 훨씬 높아지는 법이다. 이제 남은 버킷리스트는 2개다. “제과점을 차리고 싶은 게 아니냐”는 질문에 손사래를 치던 그는 수줍게 마지막 꿈을 들려주었다. “먼 훗날 펜션을 운영하고 싶어요. 제가 직접 빵과 과자를 구워 펜션 손님들에게 대접하고, 여행자들이 베이킹을 배울 수 있도록 일일 클래스도 여는 거죠. 그리고 하나 남은 꿈은 생활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가족들과 사는 것입니다” 최문섭 셰프는 인생을 ‘건물을 짓는 일’에 빗댔다. “저는 이제 막 인생의 기초공사를 마쳤어요. 앞으로 저만의 건물을 천천히 올려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