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Yun Mun Ju 욕망이라는 이름의 열정 블랑제리11-17 윤문주 셰프 윤문주 셰프가 제과제빵을 시작한 무렵부터 다짐해온 것이 있다. 바로 셰프의 공식은 ‘100-1=99가 아닌 0’이라는 것. 처음에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그가 한 번의 실수로 무너지지 위해 얼마나 스스로를 갈고 닦아 왔는지 그리고 그것을 ‘욕심’이라는 단어로 그동안 겸손하게 숨겨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늘 새로움을 갈망하고 탐구하는 진정한 배움의 아이콘. 그는 열정 가득한 제빵사이자 파티시에다 취재 • 글 박소라 사진 이재희 강원도 청년, 제빵사 되다 친구 따라 선택한 길. 윤문주 셰프의 시작은 이 말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2003년, 그의 나이 스물이었다. 수능 시험을 망친 스무살 청년의 선택은 결국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리는 것. 요리는 그가 가장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반전은 있다. 요리를 배우는데 어쩐지 곁다리인 제과제빵에 더 흥미가 갔단다. 그후 대경대 제과제빵학과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빵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그는 동기들 사이에서 꼴찌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제빵사의 꿈을 꾸고 학원에서 기초를 배운 뒤 입학했던 학생들과 달리 그는 대학이 배움의 첫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들과 함께 손발을 맞추고 남아서 연습하는 것이 재밌어서 배우는 것 자체가 신이 났다. 그는 군대 제대와 동시에 고향인 강원도에서 상경했다. 가난한 집안환경 탓도 있었지만 그가 꼭 서울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다. 서울의 유명한 빵집들을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 그때 본누벨을 보고 마음을 홀렸단다. 언젠가 이 빵집에서 꼭 일해보리라. 그때부터 본누벨은 그의 목표가 됐다. 경력을 쌓기 위해 거친 곳이 대형 윈도 베이커리 ‘빠나미’와 김영모 과자점이다. 하지만 정작 그의 인생에서 터닝포인트가 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짧지만 굵직했던 미국 생활. 2008년 윤문주 셰프는 모교인 대경대 교수였던 신현수 셰프의 부름을 받고 망설임 없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대학 시절 신현수 교수의 수업을 듣기 위해 2학년 때 1학년 수업을 다시 들었을 정도로 신 교수를 의지했었다. 미국과 본누벨에서의 값진 경험 미국에서 윤문주 셰프는 신현수 교수가 오픈한 애틀랜타의 베이커리 카페 ‘마음’에서 페이스트리 매니저로 일했다. 마음에서는 식사 빵, 케이크는 물론 웨딩케이크와 디저트 뷔페까지 다양한 품목을 선보였다. 그중에서도 웨딩케이크는 당시 한국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품목이었는데, 도전을 즐기는 그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매일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미국이라는 큰 무대에서 그들의 문화와 세계적인 규모의 베이커리시장을 접하면서 제과제빵에 대한 시야를 한층 넓힐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10개월 만에 그는 한국행을 택했다. “미국은 일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지만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에요. 300만원의 월급을 받고 일했으니 한국보다 돈은 많이 벌 수 있어요. 그런데 점점 기술에 대한 갈망이 커지더라고요. 10개월 동안 늘 그런 마음이 있었죠” 결국 그는 해외 무대에서 경력을 쌓을 기회를 뒤로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귀국하자마자 찾은 곳은 그렇게도 꿈꿔왔던 본누벨이다. 사실 그가 본누벨에서 가장 매료된 것은 제품이었다. 그는 디자인은 물론 맛에서도 사소한 디테일까지 완벽하게 살린 본누벨의 제품들을 동경했다. 뿐만 아니라 서강헌 셰프는 단지 제품을 완성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초콜릿 하나를 만들면 패키지부터 디스플레이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세요. 그런 부분이 너무 대단하게 느껴졌어요. 그 무렵 본누벨의 패키지를 모두 모으곤 했어요. 그후로 습관이 돼서 지금도 다양한 패키지를 모아요. 본누벨에 있을 때 오너셰프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운 것 같아요. 많이 혼나긴 했지만(웃음) 본누벨에서 일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죠. 정신적 지주가 신현수 선생님라면 기술적 지주는 서강헌 셰프님이에요” 집안 사정으로 잠시 일을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서 셰프가 그를 붙잡아 제빵사로 남게 했다. 2011년은 그에게 가장 힘든 해였다. 그의 아버지가 사고로 척수를 다치면서 전신마비 진단을 받은 것이다. 서 셰프의 배려로 그는 병간호와 일을 병행할 수 있었다. 12시부터 아침까지 일한 뒤 낮부터는 아버지를 돌보는 날들이 1년간 이어졌지만 끝내 손에서 반죽을 놓지는 않았다. 그는 본누벨에서 2009년부터 2012년까지 4년을 일했다. 40~50명 정도의 직원이 근무하는 본누벨에서 28살의 나이에 계장을 맡고 초콜릿공예, 설탕공예 등을 선배들의 어깨너머로 공부하면서 한 뼘씩 성장해나갔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본누벨을 그만뒀다. 지금까지의 수고를 스스로 보상하듯 몇 달간 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열정이 이룬 결실 2012년도 7월, ‘블랑제리11-17’이 문을 열었다. 천호동 11-17번지. 번지수를 상호에 넣은 독특한 이름의 이 빵집은 자리를 이전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11-17’이라는 이름으로 각인돼 있다. 초창기 블랑제리11-17은 9평에 불과했다. 당시 천호동에는 하드계열 빵을 중심으로 한 동네빵집이 없었는데, 블랑제리11-17에서는 15여 종의 하드계열 빵과 마카롱, 치즈케이크 등의 몇몇 디저트를 선보였다. 모든 빵은 반죽을 냉장고에서 하룻밤 동안 저온 숙성시켜 만들었다. 그는 고객들에게 블랑제리11-17 빵의 탄생 스토리를 직접 설명해주곤 했는데, 이는 블랑제리11-17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블랑제리11-17이 처음부터 유명세를 탄 것은 아니다. 평균 하루 매출이 15~20만원에 불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40만원의 매출을 올리는 것이 꿈이자 목표였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을까. 어느 날 그에게 판을 뒤집을 기회가 찾아온다. SNS에 블랑제리11-17에 대한 칭찬 글이 올라온 것이다. 입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매장은 어느새 주민들뿐 아니라 각지에서 온 손님들로 북적였다. 지금의 아내도 그 무렵 단골손님이었다고 한다. 매출은 한순간에 2배로 뛰었다. 당시 직원은 친구와 둘뿐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오르는 매출을 감당할 수 없어 오후 2시가 되면 문을 닫아야 했다. 평균 매출이 150만원으로 늘자 그는 직원 수를 5명까지 늘렸다. 특히 마카롱은 블랑제리11-17 매출 상승의 숨은 공신이다. 윤문주 셰프는 1년 반이 지난 2013년 12월 매장을 근처로 이전 오픈했다. 더 이상 11-17번지에 머물러 있지 않았지만 상호는 그대로 유지했다. 9평에서 50평으로 가게 규모는 대폭 확대됐다. 지금과는 또 다른 블랑제리11-17의 번성기. 그는 요즘도 종종 그 시절을 회상한다. 두 번째 매장 ‘르봉마리아쥬’는 그가 기세를 몰아 1년 뒤인 2014년 10월에 오픈한 디저트 숍이다. 블랑제리11-17의 2호점이 아닌 디저트 숍으로 돌연 방향을 튼 이유에 대해, 그는 제빵사로서 디저트시장을 새롭게 개척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뜨내기 고객이 대부분인 경리단길에서 디저트만으로 승부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 매장에는 항상 손님들이 많았지만 그저 공간을 즐기다 돌아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적자가 이어지면서 상황은 일파만파로 악화됐다. 이대로라면 블랑제리11-17에도 영향을 미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이를 만회하기 위해 그는 2015년 잠실에 르봉마리아쥬 2호점을 열기에 이른다. 7,000세대가 거주하는 아파트 상권에 자리한 2호점은 한 마디로 ‘잭팟’이었다. 오픈과 동시에 무서운 속도로 디저트가 팔려나갔다. 그는 2호점이 잘되면서 1호점을 접었다. 지금은 블랑제리11-17과 르봉마리아쥬 2곳을 운영하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 등 점차 예전과 달라지고 있는 업계의 상황에 맞춰 윤문주 셰프는 변화의 물결을 타는 중이다. 최근에는 케이크의 종류를 20가지에서 12가지로 대폭 줄였다. “현재 우리 직원들의 1인당 생산량은 50만원 정도에요. 직원들에게 공정한 대우를 하면서 생산량을 전과 똑같이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장 시스템을 바꿔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종류를 최소한으로 하되 개수를 늘리는 쪽으로 제조 방식을 조금 바꾼 거죠” 그 이유는 단 하나,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다. “블랑제리11-17이 오랜 시간 이어지려면 직원들이 중요해요. 이제 윤문주의 빵집이 아니라 우리들의 빵집이잖아요. 직원들이 없으면 저도 없어요” 윤문주 셰프는 블랑제리11-17과 르봉마리아쥬의 이미지를 빵과 디저트가 모두 맛있는 곳으로 각인시키고 싶다고 한다. 특히 디저트에 대한 욕심이 커지고 있다. 언젠가는 프랑스의 제과점처럼 디저트를 중심으로 라인업을 구상하고 몇 가지 식사 빵을 함께 판매하는 공간으로 매장을 업그레이드할 꿈을 꾼다. 그리고 제빵과 제과를 모두 섭렵한 특기를 살려 공방을 열 계획도 있다. 한 편으로는 앞으로도 계속 배움의 끈을 놓지 않을 생각이다. 여러 대회에 출전한 경험과 수상 경력이 많지만 그는 여전히 갈증을 느낀다. 아이스크림, 요리 등 배우고 싶은 분야가 아직 많고 대회 소식을 들으면 도전 욕구부터 솟아오른다. 이에 대해 그는 스스로 “욕심이 많아서”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사실, 그 본질은 열정이 아닐까. *<파티시에> 11월호 ‘우리시대기술인’의 기사 내용 일부를 정정합니다. 98p “거의 모든 빵에 이스트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단팥빵 같은 단과자 빵에만 5% 가량의 이스트를 첨가했어요…” 중 5% → 0.5% 블랑제리11-17 주소 서울시 성동구 뚝섬로1가길 25(성수동) 문의 02-462-4730 르봉마리아쥬 주소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로35길 10 지하1층 104호(신천동) 문의 02-790-6718 약력 2007년 빠나미 근무 2008년 김영모 과자점 근무 미국 베이커리 카페 ‘마음’ 페이스트리 매니저 2009년 본누벨 근무 2011년 캘리포니아 레이즌 베이커리 신제품 개발 콘테스트 금상 Siba 2011 대형 빵공예 부문 동상 2012년~現 블랑제리11-17 오너셰프 2014년~現 르봉마리아쥬 오너셰프 베이커리 페어 대형 초콜릿공예 부문 동상 2016년 『빵』 발간 2017년 Siba 2017 대형 초콜릿공예 부문 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