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준비하며 오늘을 살다 롯데호텔 오세백 제과장 롯데호텔 오세백 제과장을 보면 ‘1만 시간을 들이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이 떠오른다. 1만 시간이 넘도록 셰프는 호텔에서 빵과 디저트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30년 근속을 앞둔 그는 후배 셰프들에게 조언한다. “항상 미래를 대비하라”고. 취재․글 구명주 사진 이재희 인생을 바꾼 88년 서울 올림픽 “안경을 바꿔 쓸까요?” 사진을 찍기 직전, 오세백 셰프는 쓰고 있던 안경 대신 다른 안경을 찾아와 꺼내 들었다. 새로운 안경을 쓰자 안경테에 가려졌던 눈매가 그제야 또렷하게 드러났다.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셰프의 면모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그의 섬세함에 다시금 놀랐다. 셰프와 마주 앉은 테이블에는 이번 인터뷰를 위해 밤늦게까지 준비한 레시피, 답변서, 빛바랜 사진 등이 쌓여 있었다. 그런 그가 주방에서 얼마나 세심하게 디저트를 만들지 짐작이 갔다. 오세백 셰프의 이력을 요약하면 단 한 줄이다. ‘1988년부터 2015년까지 롯데호텔 서울 근무’. 그는 현재 델리카한스를 총괄하고 호텔에서 생산되는 빵과 디저트를 책임지는 제과장이다. 셰프는 빵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은 수십 년 전 그날을 잊지 못한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던 때였어요. 전철을 타고 대방동을 지나는데 제과학교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제과학교에서 빵과 과자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죠” 찰나의 결심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평범한 대학생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고 말았다. 더군다나 그의 가슴엔 늘 ‘어머니’라는 존재가 멍울져 맺혀 있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자식들을 키우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는 하루빨리 성공하고 싶었다. “당시 한 학기 대학교 등록금은 어머니가 받는 6개월 치 월급과 맞먹었어요. 속 편하게 대학을 다니며 공부만 할 수 없었죠”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들은 그렇게 공부가 아닌 기술을 택한다. 제과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의 나이 27세. 빵집의 책임자가 된 또래가 있었을 정도니 그의 앞에 ‘늦깎이’라는 말이 따라붙는 건 당연했다. 제과학교를 졸업한 셰프가 일을 시작한 곳은 롯데호텔이 아닌 63빌딩 베이커리였다. 63빌딩 베이커리에서 일한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일을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롯데호텔의 채용공고를 봤기 때문이다. 공고의 골자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올림픽 선수촌에서 일할 셰프를 뽑는다는 것. “세백아 너는 호텔에서 일하면 크게 될 거야. 네 이미지, 네 말투 모두 호텔과 잘 어울리거든” 제과점으로 실습을 나간 오세백 셰프에게 누군가가 해준 말이었다. 불현듯 떠오른 조언 때문이었을까. 셰프는 롯데호텔에 지원할 용기를 얻는다. 올림픽 선수촌에서 선수들이 먹을 빵과 과자를 만들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는 호텔의 정식사원이 돼 있었다. 선수촌을 나온 오세백 셰프가 출근한 곳은 소공동에 자리한 롯데호텔 서울이다. ‘레시피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다 호텔에 들어간 셰프는 여러 부서를 순회하며 호텔에 필요한 다양한 기술을 배워 나간다.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국제회의, 연회 등 굵직한 행사에 내놓을 제품을 만들거나 레스토랑을 위한 빵과 디저트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디저트는 요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꽃입니다. 아무리 요리가 맛있다 해도 디저트가 맛없으면 요리까지 망치는 거예요. 반대로 앞선 요리가 별로였다 하더라도 디저트가 훌륭하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거든요” 디저트가 ‘음식의 마침표’와 같다는 걸 깨달았기에, 허투루 디저트를 만들기 싫었다. 셰프는 그동안 무려 10만 개의 레시피를 수집했다. 글쟁이가 타인의 글을 필사하듯이 셰프는 약 15년 전부터 책이나 세미나 등에서 본 다른 사람의 레시피를 그냥 넘기지 않고 차곡차곡 컴퓨터에 저장해 나갔다. “10만 개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재차 확인하는 말에 셰프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셰프가 자체적으로 만든 ‘레시피 데이터베이스’에는 다양한 제품이 빵, 케이크, 페이스트리 등 종류에 따라, 크림, 치즈 등 사용한 재료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돼 있다. “호텔에서 일하다 보면 갑작스럽게 디저트를 만들어 내야 할 때가 많거든요. 그때 데이터베이스를 참고하면 아이디어가 샘솟아요. 세상에 완벽하게 새로운 것이란 없죠. 다만 새로워 보이는 것도 결국엔 기존의 것을 조금 더 멋지게 맛있게 변형한 것입니다. 좋은 셰프가 되기 위해선 응용력을 길러야 해요” 오세백 셰프는 디저트를 만들 때 되도록이면 제철 식재료를 이용하고, 또 외국인 손님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고자 한국적인 식재료를 가미하기도 한다. 봄이면 딸기가, 여름이면 복숭아가 셰프의 디저트에 고스란히 등장한다. 계절을 반영한 셰프의 디저트를 보면 그날의 기온과 바람의 세기까지 느껴질 정도다. 일례로 오세백 셰프가 5년 여 전에 개발한 ‘프리미엄 딸기 케이크’는 시즌마다 사랑받고 있다. “딸기와 어울리는 스펀지와 크림을 여러 차례 연구한 끝에 손님들이 좋아할 최적의 맛을 찾아냈습니다. 케이크를 먹고 고맙다고 편지를 보내는 손님도 있죠” 묵묵히 한 길을 걷는 자세 오세백 셰프는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를 모두 롯데호텔 서울에서 보냈다.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사라져 가는 요즘 시대에 게다가 이직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 업계에서 오 셰프의 삶은 신기할 정도다. 당장에라도 호텔을 뛰쳐나가고 싶은 서러운 날, 자신의 이름을 건 제과점을 열고 싶은 날, 더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스카우트를 받은 날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셰프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셰프를 관두고 사범대에 진학하려 했던 적도 있어요. 하지만 이내 교사가 되려는 마음을 접었어요. 공부를 시작할 에너지를 제과제빵에 더 쏟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무엇보다 오세백 셰프는 롯데호텔 이병우 총주방장을 떠날 수 없었다. 오세백 셰프에게 조리 명장인 이병우 주방장은 친형이라 생각할 만큼 소중한 가족이며 항상 그를 일으켜 세우는 스승이자 멘토다. “제가 풋내기 셰프였을 때부터 책임자가 된 지금까지 제 곁에는 총주방장님이 계시죠. 나태해지면 채찍질을, 좌절할 때면 용기를 주시면서요” 해외에 나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라 기회를 준 은인도 이병우 총주방장이었다. 덕분에 셰프는 초콜릿 대가인 코지 츠지야 셰프가 이끄는 도쿄 테오브로마 등 일본으로 수차례 연수를 떠날 수 있었다. 2007년 셰프는 비로소 롯데호텔의 빵과 과자를 총감독하는 제과장이 됐다. 제과장이 된 뒤부터 새벽 5시 반이면 집에서 나와 호텔로 향하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휴식을 취한다. 가혹한 제과장의 일과는 제과장이 얼마나 무거운 직책인지를 방증했다. “멀리서 바라볼 때 멋져 보이기만 한 자리였는데 막상 제가 그 자리에 앉아보니 버겁더라고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챙겨야 하는 위치니까요” 디저트가 잘못 만들어지는 바람에 대형 행사가 틀어질 때면, 따가운 화살을 몸으로 막아내는 것도 제과장의 몫이었다. 혹여 큰 손실이 발생할까 수면제를 먹지 않고서는 잠을 청하지 못한 때도 있었다. 힘들었던 에피소드를 풀어놓던 셰프는 인생을 ‘수플레’에 견주었다. “수플레 반죽을 오븐에 넣으면 쫙 부풀어 오르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금세 푹 주저앉아요. 우리 인생도 수플레처럼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합니다. 등락이 심한 인생을 잘 사는 법을 이제는 알 것 같아요. 항상 준비하면서 매 순간 열심히 사는 겁니다. 능력을 키우기 위한 투자를 아끼지 마세요” 셰프는 몇 년 전부터 본점뿐만 아니라 잠실, 부산, 울산, 제주도의 롯데호텔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올해 6월에는 제주도에서 2주간 머무르며 직원 교육을 했다. “전국의 모든 롯데호텔이 완벽하게 동일한 제품을 만들 순 없겠지만, 될 수 있는 한 수준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본점의 베스트셀러를 다른 지점에서도 팔 수 있도록 레시피와 노하우를 공유해 나갈 겁니다” 정년퇴임을 한 다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자 셰프는 말을 아꼈다. “아직 제가 몸담고 있는 곳은 호텔이잖아요. 지금 하는 일을 잘 매듭짓고 싶어요” 3년 뒤면, 셰프가 롯데호텔에서 일한 지 무려 30년이 된다.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을 기나긴 시간이다. “만약 셰프 인생을 롯데호텔에서 마감한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아요” 온힘을 다해 성실히 살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우문현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