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곡동의 랜드마크, 쉐라메르 어머니의 집을 향하다 사거리 어디에서도 눈에 띄는 이 빵집은 22년간 산곡동의 랜드마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쉐라메르 과자점. ‘어머니의 집을 향하다’라는 뜻을 가진 쉐라메르에는 엄마의 마음을 담아 만든 빵이 가득하다.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기본. 올리브오일은 유기농만 고집하고, 100% 버터만을 사용하는 등, 빵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는 깐깐하게 따져 가장 상급의 재료만 사용한다. 홍순기 대표는 지금까지 빵에 1g의 마가린도 넣어 본 일이 없다. 우유 수급이 어려운 여름조차 값비싼 버터를 사들여 빵을 만들었다. 좋은 재료로 만든 쉐라메르의 빵 종류는 무려 675가지. 프랜차이즈 빵집에서는 흉내낼 수 없는 내공을 자랑한다. 솜씨 좋은 어머니가 매일 다양한 빵을 구워주는 느낌이랄까. 이곳의 솜씨 좋은 어머니 역할은 끼리크림치즈경연대회에서 빵부문 대상을 수상한 김영덕 파티쉐가 맡고 있다. 그는 혜전대학교에 출강 중인 실력과 학식을 갖춘 파티쉐. 대표님과의 인터뷰 중간 제품설명을 위해 매장에 나온 그는 머리칼 한 올 내려오지 않도록 위생모를 단단히 쓰고, 이물질이 묻을새라 수술실에 들어선 의사처럼 팔을 든 채였다. 그런 파티쉐의 모습을 보니 맛도 중요하지만, 이곳 빵의 청결함에 먼저 믿음이 갔다. 쉐라메르의 주인’들’ 사실 쉐라메르의 본래 이름은 ‘케익이벤트’였다. 처음 산곡동에 문을 열었을 때부터 6년간 이 이름을 썼다. 그러다 불어로 된 지금의 새 이름으로 바꾸게 되었다. 하지만 그간 동네의 랜드마크였던 케익이벤트를 벗어내는 것은 주민들에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민들은 불어인 쉐라메르를 어색해 했고, 나중엔 홍 대표에게 왜 상의도 없이 이름을 바꾸었느냐며 볼멘소리를 냈다. 홍 대표는 그제야 자신의 가게 앞에서 약속을 잡고, 가게를 중심으로 길을 설명하는 주민들을 보았다. “이곳은 저의 가게지만, 저’만’의 가게는 아니더군요.” 이사를 가서도 빵 맛을 못 잊어 다시 찾아오는 손님부터,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케익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은 사할린 할머니까지, 하루 300~400명의 다양한 손님이 쉐라메르를 찾는다. 홍 대표는 손님의 숫자만큼이나 묵직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고객이 좋아하는 제품을 만들자’는 고객 중심의 철학을 바탕에 두고 앞으론 고객의 건강까지 생각하겠다는 홍 대표. 그의 포부는 믿음직하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쓴다고 해도 제 입으로만 얘기해선 별 의미가 없잖아요. 앞으로는 학계나 전문가의 의견서를 첨부한 제대로 검증된 재료를 이용해 고객들께 더 큰 믿음을 드리고 싶습니다.” 윈도우 베이커리의 미래 처음 매장은 지금의 3분의 1 크기에 불과했다. 조그만 베이커리의 오픈을 준비하던 홍 대표는 1991년 8월, 인테리어 사기를 당했다. 어렵게 마련한 자본금을 날릴 위기에 처해 3개월간 도망친 업자를 찾기 위해 전국을 헤맸다. 액땜을 크게 치렀기 때문일까. 그 이후 3개월 늦게 오픈한 가게는 지금까지 7번의 확장을 거쳐 3배가 넓어졌다. 자신의 경험을 발판삼아 홍 대표는 제과점을 내려는 후배들에게 확장이 가능한 점포를 알아보라고 조언한다. “가게가 성장할 가능성을 보고 성장할 만한 공간을 따져두는 것이 좋아요. 스스로의 경영 마인드에도 도움이 되고, 가게의 미래에도 좋은 선택이 되죠.” 이처럼 당장의 현실보다 미래를 앞서 보라고 말하는 홍 대표는 수많은 윈도우 베이커리가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에 밀려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프랜차이즈의 편안함을 쫓다 보면 현실에 안주하게 되어 발전할 수 없어요. 프랜차이즈식 틀에 박힌 기술은 응용이 될리 만무하지요. 당장 편한 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10년, 20년을 갈 수 있는 기술을 갖추어 윈도우 베이커리의 가능성을 배우려는 친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홍 대표의 마지막 말에서 제과제빵업에 대한 깊은 사랑이 느껴졌다.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프랜차이즈 빵집이 난무하는 요즘, 소신과 뚝심을 갖고 20여년간 터와 맛을 지켜온 쉐라메르. 이곳은 앞으로의 20년이 더 기대되는 빵집이다. 취재, 글 조진희 사진 이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