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한 자리를 지키다 힐튼제과 그곳에 가면 공갈빵이 있다 “멋진 제과점도 많은데 왜 하필 보잘것없는 우리 가게를 취재하려 해요?” 처음 취재를 요청했을 때, 힐튼제과 정양자 사장은 손사래를 쳤다. ‘보잘것없다’ 했지만 그건 지나친 겸손이었다. ‘외래어 사용 금지’라는 규제 때문에 힐튼제과에서 고운제과로 이름을 바꾼 적은 있어도 다른 업종으로 한눈을 판 적은 없다. 1985년부터 2014년까지 역삼동 대로변을 지킨 빵집.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뀔 시간을 견뎌낸 빵집은 그 어떤 곳보다 값져 보였다. 몇 번의 설득을 거친 끝에 찾아간 빵집은 따뜻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힐튼제과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즉석빵전문점’이라는 글자 그리고 나란히 줄지어 선 공갈빵이었다. 공갈빵이 맛있는 가게로 소문이 난만큼 힐튼제과의 공갈빵은 때를 잘 맞추지 못하면 사 먹을 수 없다. 힐튼제과에서 매일 만들어지는 공갈빵의 개수는 80여 개에 이른다. 공갈빵을 좋아하는 지방의 한 손님은 퀵 서비스와 고속버스 택배를 동시에 이용해 사 먹기도 한단다. 취재 당일, 김종옥 공장장이 정성껏 만들고 있는 빵도 바로 공갈빵이었다. “아몬드가루로 만들기 때문에 일반적인 공갈빵과는 차원이 달라요. 얇게 반죽을 잘 만드는 게 비결이죠” 공갈빵이 인기라지만 힐튼제과는 속이 텅 빈 공갈빵의 성격을 닮지 않았다. 가게의 규모가 비록 작아도 빵의 품질은 여느 빵집에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도 빵을 허투루 만들지 않는 빵집의 진심을 헤아린다. 물론 좋은 손님만 있는 건 아니다. 가게를 시작했던 초창기, 롤케이크를 먹고 배탈이 났다며 항의를 하는 통에 빵집의 하루 매출과 맞먹는 돈을 손님에게 쥐여 준 적도 있었다. 다행히 해를 거듭할수록 블랙컨슈머들은 발길을 끊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단골손님이 늘어갔다. 부부의 30년 외길 인생 가게가 오래되다 보니 오랜만에 동네를 찾았다가 놀라는 손님도 있다. “이모, 아직도 계시네요?”라며 빵집에 들른 아가씨에게 정양자 사장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인사를 띄우기도 한다. “이모가 아니라 이제 할머니야” ‘할머니’임을 강조하는 정양자 사장은 빵집에 반평생을 바쳤다. 그녀는 잠시 일을 쉬고 있던 찰나, 우연한 기회에 빵집을 인수했다. 그 뒤로 정 사장은 더우나 추우나 빵집에서 제빵사들과 동고동락하고 있다. 현재 그녀와 함께 빵집을 경영하는 또 다른 오너는 남편인 백후기 씨다. 백 사장은 특유의 꼼꼼함으로 일일이 빵을 포장하고 있다. 부부는 직접 빵을 만드는 전문가가 아니기에 우수한 제빵사를 등용하는 데 특히 신경을 써왔다. 다행히 제빵사들은 한번 연을 맺으면 쉽게 빵집을 떠나지 않았다. “인복이 있나 봐요. 좋은 제빵사들을 꾸준히 구할 수 있었거든요” 현재 힐튼제과의 제품을 도맡고 있는 김동옥 공장장도 12년 가까이 힐튼제과에 몸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힐튼제과의 빵은 일관되게 맛있다. 손님과 함께 나이 먹는 빵집 최근 공갈빵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사랑받는 품목은 건강쿠키다. 이름 그대로 이 쿠키에는 호박씨, 호두 등 각종 견과류가 가득 들어가 있다. “고등학교의 어느 교장 선생님은 몇백 개씩 쿠키를 주문하곤 해요. 다른 건 팔지 말고 건강쿠키만 만들라고 할 정도죠” 심지어 일주일동안 먹을 식빵을 한 번에 사가는 손님도 있다. 손님이 먼저 ‘빵이 너무 싸다’고 걱정하는 재미난 일도 힐튼제과에선 벌어진다. 손님은 빵집과의 의리를 오래도록 지키고 있었다. 이제 빵집은 손님과 함께 늙어가고 있다. 어릴 적 봤던 꼬마 아이가 어른이 되어 유학길에 오르는가 하면, 힐튼제과의 맘모스빵을 먹고 입덧을 견뎠다는 산모가 자신의 딸과 함께 찾아오기도 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500개가 넘는 케이크를 정신없이 팔던 때도 있었어요. 비록 호시절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우리 가게의 빵을 사랑해주는 손님이 많으니 힘을 내야죠”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 가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 아니던가. 어떤 풍파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은 힐튼제과는 동네를 지키는 아름다운 고목(古木)처럼 보였다. 주소 서울시 강남구 언주로 317 문의 02-553-8126 취재•글 구명주 사진 이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