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야 산다” 브레드 몽드 김창기 셰프 브레드 몽드의 빵 진열대는 저녁 8시가 되면 텅텅 비기 일쑤다. “빵이 없냐?”고 묻는 손님들에게 김창기 오너셰프는 “죄송합니다”라며 인상 좋은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마음 착한 셰프가 무자비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무기는 딱 하나, 기술을 갈고 닦고 또 닦는 것이었다. “아직도 배울 게 얼마나 많은 데요” 30년 가까이 빵을 만들어온 중견 셰프의 겸손한 말 한마디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취재・글 구명주 사진 이재희 동네빵집에서 살아남는다는 것 수원시 권선동에 자리한 브레드 몽드는 ‘횡단보도 앞 그 빵집’으로 통한다. 횡단보도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빵집의 문이 열리고 손님들이 들어온다. 심지어 횡단보도를 끼고서 한쪽에는 브랜드 아파트 대단지가, 반대쪽에는 원룸 & 빌라촌이 형성돼 있다. 쉽게 말해 ‘빵집하기 딱 좋은 위치’. 입지가 워낙 좋다보니 빵집이 잘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김창기 셰프는 알고 있다. 아무리 자리가 좋다고 한들 빵이 맛없다면 손님들은 매몰차게 동네빵집을 외면하고 만다는 것을. 그는 브레드 몽드를 창업하기 전 군포에서 한 번, 광명에서 또 한 번 가게를 오픈했었다. 군포에 창업했던 첫 번째 빵집은 대형 마트의 빵집에 밀렸고, 광명에 오픈했던 두 번째 빵집도 5년간 운영한 뒤 접어야만 했다. 셰프는 군포에서 빵집을 운영했던 그때를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기억한다. 두 살배기 딸을 형님네 맡기고서 셰프는 아내와 함께 빵집을 근근이 이끌어 나갔다. 당시 셰프의 퇴근 시간은 새벽 1~2시, 직원의 퇴근 시간은 오후 5시. 직원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선물하고 싶었던 셰프는 직원들이 자리를 뜬 텅 빈 주방에서 이를 악 물고 빵을 만들었다. “제가 데리고 있는 직원들만큼은 저와 다르게 살길 바랐어요. 제가 젊었을 때는 빵집에 갇혀 살다시피 했으니까요”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그가 혹독하게 빵을 만들었던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제빵사였던 인척의 소개로 1988년, 불광동 태극당에 입사한 셰프는 허리를 펴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다락방에서 먹고 자며, 열악한 주방에서 빵을 만들었다. 새벽 5시 30분이면 일어나 정신없이 빵을 만들었으니 몸은 항상 피곤했고 아침이면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그 당시엔 놀라울 것 없는 흔한 풍경이었죠. 그래도 태극당에서 일하는 동안 즐거웠어요. 돌아가신 김승현 공장장님은 아직도 가끔씩 그립습니다. 유머를 잃지 않고 항상 따뜻하게 빵을 가르쳐 주셨거든요” 불광동 태극당, 압구정 크리스탈 제과점 등을 거친 그는 방배동 에펠제과의 책임자를 맡게 된다. “그때 제 나이가 20대 중반에 불과했어요. 스스로 기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사장님은 ‘이제 마음 놓고 빵을 팔 수 있겠다’고 칭찬해주셨죠. 그 칭찬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음에 새겨두고 있답니다” 한 번의 일탈 끝에 희열을 느끼다 하지만 과중한 업무가 반복되자, 제빵에 대한 회의감이 감당할 수 없이 밀려들었다. 제빵만 아니면 뭐든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빵집을 뛰쳐나와 보험 상품을 파는 일에 뛰어들었다. 물론 일탈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끝났다. 셰프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건 보험사 지점장이었다. “몇 살에 무엇을 하고, 몇 살에 무엇을 할지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인생 지도를 그려봐라” 지점장의 얘기를 듣고 나자, 제과제빵 자격증 취득하기, 집 장만하기, 결혼하기 등 소박하고도 당연한 꿈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그는 천안의 빵굽는하우스에 취직하며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로 마음먹는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천안에 내려간 그는 자신이 세운 목표를 하나씩 이뤄 나갔다. 빵집과 헬스장을 오가며 오직 제빵과 취미인 운동에만 매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기술을 업그레이드 시키고도 싶었다. 청량리 한미제과제빵학원 기술자반에 찾아간 건 바로 이맘때다. 셰프는 일주일에 3번씩 천안과 서울을 꼬박꼬박 오가며 학원 수업을 챙겼다. “천안에서 기차를 타면서까지 학원에 다녔어요. 박찬회 명장님, 함상훈 명장님께 데커레이션 기법, 화과자 등을 배웠죠” 수업을 마치고 청량리역에 달려가면, 시계는 자정을 가리켰다. 덜컹이는 밤기차에 몸을 실을 때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한미제과제빵학원에 다닌 건 시작에 불과했다. 천안에서 군포로 올라와 자신의 가게를 차린 이후에도 현대제과제빵학원, 리치몬드제과기술학원 등 기술자반이 개설된 학원이란 학원은 모조리 찾아다니며 기술을 연마하고자 했다. 학원뿐 아니라 베이크플러스, 선인, 제원 등이 기술 세미나를 연다고 하면 발 빠르게 찾아갔다. 그런 그가 제과기능장 시험에 응시한 건 당연했다. 2012년 셰프는 제과기능장이 되었다.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려면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그만큼 더 신나요. 일전에 몰랐던 것을 하나 둘 배우는 재미가 얼마나 큰지 몰라요” 심지어 군포에 이어 광명에서 빵집을 운영할 당시에는 SPC컬리너리 아카데미가 운영하는 에꼴 르노뜨르 과정까지 밝기에 이른다. 1980년대 제빵 업계에 입문한 중견 오너셰프와 SPC컬리너리 아카데미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수강생 중 상당수는 취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이나 베이킹 스튜디오를 차리려는 초보 창업자들이었다. “동네빵집의 적인 SPC가 운영하는 교육기관이라고 해서 피할 이유가 있나요. 더 좋은 기술을 배울 수만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말아야죠. 르노뜨르에 다니면서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유럽 스타일의 빵과 과자는 어떻게 맛있게 만들 수 있는지 알게 됐습니다” 그는 국내에서 에꼴 르노뜨르 수업을 5개월간 받고 프랑스 에꼴 르노뜨르로 연수를 떠나 디플롬을 취득했다. 외국에서 교육을 받느라 지쳤을 법도 한 데 셰프는 프랑스에서 귀국한 바로 그 다음날, 휴식 대신 일을 택했다. 프랑스로 출국하기 전, 박준서 셰프가 운영하는 폴인브레드에서 한 달간 빵을 배우기로 약속을 해둔 것이다.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 하루 3시간 밖에 잘 수 없는 상황이었죠. 기술을 배우려는 욕심은 크고, 체력은 바닥이 났고. 그땐 정말 죽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미련하다고 할 정도로 제빵에 집착한 그에게 세상이 기회를 준 것일까. 세 번째 가게를 내려고 자리를 알아봤던 2014년 경 셰프는 ‘횡단보도 앞 가게’를 발견한다. 가게를 본지 이틀 만에 계약을 하고 가게에는 ‘빵 세상’이라는 뜻의 ‘브레드 몽드’ 간판을 내걸었다. 고향인 전라북도 익산으로 돌아가 빵집을 낼까 고민하던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시간의 퇴적물, 브레드 몽드 한때 맘모스빵, 단팥빵, 크림빵 같은 고전적인 빵만을 만들어 팔았던 그였다. 이제 셰프는 이즈니 버터, 엘르앤비르 버터 등으로 크루아상을 만들고 유기농 밀가루와 프랑스산 밀가루로 바게트, 치아바타 등 유럽의 빵을 굽는다. 특히 국산 밀가루와 프랑스산 밀가루를 섞어도 보고, 프랑스산 밀가루만 사용해보기도 하는 등 빵을 연구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그의 숨은 노력을 알아봐주는 건 역시나 손님들이다. 용인, 천안, 오산 등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셰프는 “영혼 없는 빵을 만들지는 말자”고 되새긴단다. “동네 주민분들은 부드럽거나 달콤한 빵을 더 선호하세요. 하지만 유럽 스타일의 하드계열 빵은 끊임없이 선보일 거예요. 혹여 팔지 못해 버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무엇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제품은 페이스트리류. “품질이 뛰어난 버터를 보기만 하면 당장 버터로 크루아상 반죽을 밀어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페이스트리를 편애하는 편이다. “프랑스 에꼴 르노뜨르로 연수를 떠났을 때 아침마다 크루아상을 먹었거든요. 그 맛을 잊을 수 없죠. 여건이 된다면 페이스트리 전문점을 내보고 싶어요” 빵만 보며 달려왔던 그는 요즘 부쩍 ‘가족’을 생각한다. 광명에서 첫 번째 가게를 열었을 때 두 살이었던 딸아이가 올해 중학교 3학년, 둘째 아들이 벌써 초등학교에 입학을 한다고 했다. 셰프의 곁을 항상 지켜온 아내는 브레드 몽드를 지키는 핵심 멤버. 아내는 새로 나온 빵을 가위로 뭉텅뭉텅 잘라 손님들에게 권하며 빵을 팔고, 매장을 바지런히 정리하기 바빴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눈을 맞추며 곁에서 돌봐주지 못한 게 한이 됐어요. 한창 부모의 손이 필요할 때 저는 빵을 만들어 팔았으니까요. 요즘은 아내의 행복을 찾아주고 싶다는 생각도 합니다. 앞으로는 빵을 열심히 만드는 만큼 가족도 잘 챙기고 싶어요. 제 인생의 목표는 가족이죠” ‘가족을 위해 빵을 만든다’는 김창기 셰프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브레드 몽드를 잘 지켜내고 싶다. 얼마 전에는 군포의 대형마트 빵집에서 사온 빵을 직원들과 함께 분석해봤다. 2002년 군포에서 빵집을 할 때, 마트 빵집에 밀렸던 아픈 기억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셰프는 약 14년이 지난 지금, 자신이 만든 빵과 마트 빵집의 빵을 냉정하게 비교했다. 직원들과 함께 내린 결론은 ‘이제는 이길 수 있겠다’였다. 다시 군포에 빵집을 연다면 그때처럼 허망하게 물러서지는 않으리. “브레드 몽드는 군포나 광명에 오픈했던 이전 빵집 보다 질적으로 더 나은 곳”이라 설명하는 셰프의 목소리에선 자신감이 묻어났다. 자신감의 원천은 배우고 또 배웠던 지난했던 ‘시간의 집합’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