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빵사가 행복해야 빵도 맛있다” 프릳츠 허민수 셰프 ‘빵 천재’라 불리는 허민수 셰프. 셰프는 왜 잘 나가던 ‘오븐과 주전자’를 닫고, 프릳츠에서 빵을 만들기 시작한 걸까.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던 그는 제빵 얘기를 시작하자 180도 돌변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빛은 매섭고도 진지했다. 취재‧글 구명주 사진 이재희 데이터를 토대로 정확하게 빵을 만들다 프릳츠 커피 컴퍼니(이하 프릳츠)는 요상한 베이커리 카페다. 갈비집이었던 단독주택을 개조한 외관에선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고, 손님의 발길이 끊길 법한 평일 애매한 시간에도 마치 주말인 것처럼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프릳츠의 정체가 궁금해질 무렵, 허민수 셰프가 마당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는 19살 때부터 제빵사가 되고 싶었다. “인터뷰를 하면, 왜 제빵사가 되고 싶었냐고 꼭 물으시더라고요. 솔직히 말하자면 모르겠어요. 특별한 이유 없이 빵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일생일대의 큰 사건을 겪은 것도 아니었고, 그에게 제빵사가 되라고 강요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그냥’ 제빵사가 되고 싶었다. 제과제빵 학원에서 처음 빵을 접한 그는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SPC그룹에 취업한다. 샤니의 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한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아 파견된 곳은 파리크라상 연구소. 그곳에서 그는 파리크라상의 신제품을 개발하고 셰프들을 교육하는 일을 했다. 대량 생산을 하는 SPC에서는 제빵과 관련된 것이라면 사소한 것 하나까지 숫자로 기록하고, 숫자에 맞춰 정확하게 빵을 만들어야 했다. 흡사 그 과정은 ‘1+1=2’와 같은 수학 공식을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 공식을 지키는 건 연구원의 의무였다. “SPC는 무수히 많은 데이터를 갖고 있습니다. 축적된 데이터를 토대로 연구원들은 원리원칙대로 빵을 만드는 거죠. 예를 들면 날이 더우니 물을 차갑게 써야겠다고 직관적으로 혼자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매순간 온도계와 타이머를 이용해 정확하게 계산합니다” 레시피에 맞춰 오차 없이 빵을 만드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제가 빵을 만드는 노하우는 특별할 게 없어요. 저는 기본 공정을 잘 지킵니다. 반죽 온도, 발효 시간 등을 꼼꼼하게 체크하는 거죠.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는 ‘공통의 언어’를 연구하는 것, 그리고 제빵에 필요한 언어를 직원들에게 가르치는 게 제 몫이고요. 그 언어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질 좋은 빵을 만들 수 있거든요” 덩치가 큰 회사에서 첫발을 내딛은 덕분에 그는 안정적으로 빵을 학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직원으로 살아가는 이상 자신이 원하는 빵이 아닌 회사가 원하는 빵, 팔리는 빵을 연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땀 흘려 만든 빵을 누군가가 먹고 좋아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싶은 마음 또한 커졌다. 그는 아내와 함께 자신의 가게를 차리기로 마음먹는다. 빵을 굽는 남편과 커피를 내리는 아내가 함께 일한다는 의미로 가게 이름은 오븐과 주전자로 지었다. 가게가 자리한 곳은 신혼집과 가까운 후암동이었다. 임대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후암동에서 쫓겨나 합정동으로 이전을 한 것 외엔 위기랄 것이 없었다. “윈도 베이커리 시장이 팽창하던 때였어요. 폴앤폴리나, 오월의 종과 같은 빵집들이 명성을 얻기 시작했던 시기죠. 오븐과 주전자도 윈도 베이커리의 붐을 타고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브레드 지니어스’라 불러다오 오븐 앞에서 몰입하는 그를 사람들은 빵 천재라 부르기 시작했다. 사실 빵 천재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셰프 본인이다. “제가 팝 가수 미카를 좋아하는데, 미카의 별명이 ‘팝 지니어스’잖아요. 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열정을 본받고 싶은 마음에 저도 브레드 지니어스라는 별명을 쓰기 시작했어요. ‘안녕하세요. 빵 천재 입니다’라고 우스갯소리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곤 했는데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죠” 실제로 허민수 셰프는 트위터 아이디도 이메일 아이디도 ‘브레드 지니어스(Bread Genius)’를 쓰고 있다. 그에게 맞지 않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별명이었다면 많은 이들이 그를 빵 천재라고 부르지 않았을 터. 하지만 이제는 그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사람들이 “빵 천재 허민수 셰프님 맞죠?”라고 물어온다. 그는 빵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가, 빵을 잘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가, 빵집을 운영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세 가지 꿈을 10년 안에 모두 이뤄 버린 셰프는 덜컥 겁이 났다. 무엇보다 가게를 운영하는 동안 ‘허민수’라는 셰프로서는 인정받았을지 몰라도 ‘허민수’라는 인간의 삶은 팍팍하기만 했다. 평범한 일상을 싹둑 잘라내고 오로지 숨 가쁜 일에만 매달리는 것. 그건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의 숙명인지도 몰랐다. 제빵사에겐 왜 일과 여가의 양립이 사치로 느껴지는가. 그는 훌륭한 제빵사이면서, 다정한 남편, 친구처럼 가까운 아빠이고 싶었다. 그때 새로운 길을 개척할 동지가 나타났다. 당시 커피 리브레에 일하고 있었던 김병기 바리스타다. “김병기 바리스타는 커피에, 저는 빵에 미쳐 살았죠.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돌진하는 서로의 모습에 반했다고나 할까요. 자신의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끼리 힘을 합쳐 가게를 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민수 셰프와 김병기 바리스타 외에도 박근하 바리스타, 송성만 바리스타, 김도현 로스터, 전경미 커퍼가 힘을 보탰다. 커피와 빵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야심차게 뭉친 6명은 프릳츠를 마포구 도화동에 연다. 프릳츠 초창기, 셰프는 오븐과 주전자를 함께 운영하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아예 오븐과 주전자를 닫고 프릳츠에 전념하기로 결정했다. 빵의 거친 질감을 커피가 어루만져주고, 커피 특유의 풍미는 빵을 만나 극대화 된다는 걸 빵과 커피를 함께 먹어본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커피와 빵, 빵과 커피는 바늘과 실처럼 함께 붙어있을 때 기능을 더 발휘한다. 그 특성을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는 허민수 셰프는 빵을 만들때 ‘커피와의 어울림’을 따진다. 빵만 사러 프릳츠에 오는 손님도 물론 있지만, 상당수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이곳을 찾기 때문이다. “꾸준히 제품을 바꿔 내놓고 있는데, 그때마다 커피와 어울리는 제품은 뭘까 고민해요. 지금 내린 답은 크루아상, 팽 오 쇼콜라처럼 바삭한 페이스트리와 커피는 궁합이 좋다는 거예요. 제가 만들기 좋아하는 제품 역시 페이스트리나 하드계열 빵이기도 하고요” 노동의 가치를 말하는 제빵사 허민수 셰프는 프릳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희는 주 5일 근무를 하고, 연차 제도를 운영해요. 근무 시간 외 일할 경우엔 수당을 지급하죠” 지극히 당연한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척박한 제과제빵 업계에서 프릳츠의 노동 환경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홀로 업장을 운영할 때는 항상 어딘가에 쫓기는 기분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는 셰프. 하지만 함께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 프릳츠에선 이전보다 훨씬 느긋해지고 보다 먼 곳을 내다볼 수 있단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환경 때문에 상처받고 개인의 삶은 하나도 없이 일만 하잖아요. 노동은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포함해 프릳츠에서 일하는 모든 구성원의 공통된 의견이지요. 쉬는 시간을 보장받는다고 해서 저희가 일을 소홀히 하는 건 절대로 아니거든요. 빵과 커피를 만드는 그 순간엔 무섭게 일에 매달리면서 항상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려고 노력해요” 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한국의 현실을 잘 알기에 많은 이들은 프릳츠의 시스템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프릳츠를 궁금해 하는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허민수 셰프와 김병기 바리스타는 매달 한번씩 ‘날 보러 와요’라는 재미난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셰프와 바리스타가 토크쇼의 사회자처럼 이야기를 주도하고, 손님들은 두 사람의 얘기를 듣는 방청객인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패널이다. ‘날 보러 와요’ 행사의 첫 번째 주제는 직업이었다. “직업은 종교 같다는 생각을 해요. 좋아요 싫어도 해야 하고, 신기하게 우리는 종교에게서 힘을 얻듯, 일을 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기도 하잖아요” ‘제빵’을 믿는 그는 프릳츠의 마당 왼편에 마련된 제빵 공장에서 부지런히 빵을 만든다. 원두 냄새 자욱한 카페와 달리 그곳엔 밀가루가 풀풀 날리고 뜨거운 오븐의 열기가 가득하다. 빵을 사서 나가던 중년 여성은 카페에 앉아 인터뷰 중인 허민수 셰프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우, 빵이 정말 맛있어. 잘 먹고 갑니다” 그녀의 손에 든 빵 봉지가 꽤나 두툼했다. 제빵사에게 필요한 덕목이 뭔지를 묻자, 셰프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인내’라고 답했다. “생각해보세요. 빵을 만드는 그 자체가 ‘기다림’이잖아요. 발효가 되길 기다리고, 구워지길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만 해요. 어릴 땐 마음이 급했어요. 누군가에게 빵을 가르쳐 줄 때도 재촉하곤 했고요. 빵을 만들면 만들수록 참고 기다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 같아요” 인터뷰 당시, 셰프는 곧 세상에 나올 둘째 아이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제빵사 스스로 행복해야 더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허민수 셰프. 올 봄, 두 아이의 아빠가 된 그가 앞으로 지금보다 분명 더 값진 빵을 선보일 거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