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념으로 일군 파티시에의 길 중학생 때 제과제빵을 시작해 이십대 중반에 이미 몇 십 명을 거느리는 공장장이 되었던 최명갑 셰프는 그 시절이 결코 녹록치 않았다고 회상한다. 친구들이 한창 청춘을 만끽할 때 그는 사방이 막힌 주방에서 빛 한 번 못 보고 일을 해야 했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깡’도 키워야 했다. 때문에 그는 젊은 시절부터 주춤하기보단 돌진하는 스타일이었다. 한 번 목표를 정하면 포기하지 않고 보란 듯이 달려드는 집념. 그가 자신의 인생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요인은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닐까. 취재·글 박소라 사진 이재희 연필 대신 반죽을 잡은 16세 소년 일산 주엽동에 위치한 트리옹프 제과점은 여느 동네빵집과는 조금 다르다. 매대에는 동네빵집 하면 연상되는 단팥빵과 소보로빵 대신 쿠글로프, 팽 오 쇼콜라, 브리오슈 같은 비엔누아즈리가 진열돼 있고 쇼케이스에는 새하얀 생크림케이크가 아닌 독특한 디자인의 앙트르메와 프티 케이크가 프랑스어로 된 네임태그를 단 채 잔뜩 놓여 있다. 무엇보다 발음하기 쉽지 않은 트리옹프라는 이름은 주민들이 대다수인 손님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러나 트리옹프에는 이보다 더 재밌는 비밀이 몇 가지 숨겨져 있다. 1982년 파리에서 창업한 파티스리 르 트리옹프에서 비롯됐다는 것. 오너세프가 그곳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는 것. 그는 35년의 경력을 지닌 파티시에, 최명갑 셰프다. 전라북도 진안에서 태어난 셰프는 그 시대 청년들이 그렇듯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빵을 배웠다. 그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그가 여러 기술직 중에도 빵을 선택한 건 앞서 제빵사의 길을 걷고 있는 큰형의 도움이 컸다. 먼 친척 중엔 큰 제과점의 공장장으로 일하는 제빵사도 있었다. 환경 탓인지 그는 어릴 때부터 제빵사가 자신의 길이라고 확신했다. 첫 직장은 경희대 앞에 위치한 그랜드 제과점. 하지만 소년의 티를 벗지도 못한 중학생에게 제빵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의무’에 불과했다. 잡일부터 하나씩 배우다 보니 어느새 오븐을 담당하게 됐고, 얼떨결에 두 손에는 새하얀 반죽이 들려 있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그가 제과제빵에 재미를 붙인 것은 스무살이 넘어서다. 그랜드 제과점을 나온 그는 피카딜리 제과점에서 중간 기술자로 4년을 일한 후 케익하우스 윈에 제빵 책임자로 입사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눈은 점점 투박한 빵이 아닌 화려하게 데커레이션 한 케이크로 향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더라고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전 케이크의 달콤한 맛에 매력을 느껴요. 물론 화려한 비주얼은 말할 것도 없죠” 그 세계에 발을 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니 덜컥 욕심이 생겼다. 5시에 작업이 끝나면 저녁 10시까지 연습에 몰두했다. 연습량이 많으니 습득도 빨랐다. 케익하우스 윈에서의 시간은 그에게 터닝포인트였다. 케익하우스 윈에서 연마한 기술들은 리치몬드 과자점에서 빛을 발했다. 리치몬드 과자점은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하는 그에게 기회를 줬다. 그는 리치몬드의 케이크를 100% 리뉴얼하며 솜씨를 발휘하는 한편 기술을 연마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제 기본기는 케익하우스 윈과 리치몬드 과자점에서 다져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빵집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배웠으니까요. 젊은 시절 훌륭한 빵집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그러던 중 셰프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리치몬드 과자점에서 벨루에 콩세이 장 미엘 페르숑 MOF의 마카롱 세미나가 국내 최초로 열린 것이다. “셰프의 손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정말 깜짝 놀랐어요. 마카롱은 예술 작품 같았죠.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벨루에 콩세이의 명함을 받아든 그 순간 그는 결심했다. 반드시 프랑스에 가겠노라고. 리치몬드 과자점을 나온 그는 순천 시내에 있는 화월당에 들어갔다. 지금은 규모가 많이 줄었지만 당시만 해도 화월당은 60평의 매장, 80평의 공장을 갖춘 큰 빵집이었다. 그곳에서 셰프는 처음 총괄셰프를 맡았다. 20명의 직원들을 이끌고 그 동안 갈고 닦아온 제품들을 화월당에서 미련 없이 선보였다. “마침 리뉴얼할 때 제가 들어간 거였어요. 원래 빵집은 리뉴얼 시점이 가장 힘들거든요. 직원들이랑 울고 웃고 했던 기억이 참 많아요” 그는 화월당을 ‘가장 행복하게 일했던 곳’이라고 했다. 프랜차이즈의 공세에 밀린 화월당이 다시금 번성하던 그 때, 셰프의 첫 번째 전성기도 시작됐다. 지금의 셰프를 있게 한 이름, ‘트리옹프’ 화월당을 나와 압구정 현대백화점에 있는 몬드리안 과자점에서 책임자로 일할 무렵이었다. 하루 매출만 1,000만원, 특히 명절이나 기념일 시즌이 다가오면 숨을 돌릴 틈조차 없었다. 하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매장일수록 기술은 느는 법. 서울의 대형 제과점에서 내로라하는 기술자 수십 명을 전두지휘하는 책임자였으니, 그는 셰프 인생의 절정을 맛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오히려 갈증을 느꼈다. “드디어 프랑스에 갈 시기가 온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정신을 맑게 한다는 이유로 즐겨 피우던 담배도 끊었다. 가게를 오픈하려고 모아두었던 1억원과 벨루에 콩세이의 주소가 적힌 명함을 손에 쥐고 비행기에 올랐다. 파리에 도착한 그는 바로 현장에서 일할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 파리 길가에서 운명을 바꿀 한 파티스리를 만나게 된다. “유리창으로 케이크들이 보이는데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 길로 들어가서 다짜고짜 사장을 불러달라고 했어요. 서툰 프랑스어로 ‘나는 한국에서 온 파티시에다. 정열을 갖고 당신의 제품을 배우고 싶다!’고 했죠” 밑도 끝도 없이 당당한 한국 셰프에게 사장은 뜻밖에도 기회를 줬다. 그곳이 바로 그가 프랑스에서 처음 몸담았던 곳이자 현재 트리옹프의 시발점인 파티스리 르 트리옹프다. 최명갑 셰프는 트리옹프에서 일한 첫 번째 한국인이었다. “프랑스의 제과점들은 9월부터 크리스마스 시즌을 준비해요. 트리옹프의 경우 케이크 9,000개와 갈레트 5,000개를 만들었어요. 어마어마했죠” 앙트르메 글라세를 만들 때면 차가운 온도 때문에 손가락 껍질이 벗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고 나니 그는 한 뼘 더 성장해 있었다. 그렇게 1년을 트리옹프 제과점에서 일했다. 그는 좋은 동료들 덕분에 다양한 프랑스 파티스리를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트리옹프 사장님은 지금도 저를 가족처럼 대해줘요. 처음부터 큰 행운을 얻은 거죠. 시작이 좋아선지 계속 일이 잘 풀렸어요” 셰프는 그 후 피에르 에르메, 장 폴 에방, 아르노 라헤, 티에르 무니에 등 유명한 프랑스 제과점들을 전전하며 기술을 익혔다. 일하는 틈틈이 벨루에 콩세이를 다니며 앙트르메, 쇼콜라, 앙트르메 글라세 등의 과정도 이수했다. 그는 프랑스에 있는 동안 단 1초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셰프에겐 배합비가 생명이잖아요. 그걸 얻을 방법이 없으니까 일하면서 모두 외워두는 거예요. 행여 잊어버릴까봐 퇴근하면 메모장에 잽싸게 받아 적곤 했어요” 그렇게 고이고이 한국까지 들고 온 레시피가 낡은 문서함에 한 가득이다. 무엇보다 프랑스 셰프들의 자세와 제과 기술은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그에게 스며들었다. 그는 지금도 기본을 가장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한다. 3년의 시간이 흘러 셰프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몇몇 프랑스 파티스리에서 러브콜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타지가 아닌 고국에서 비상하고 싶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현실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몇 년간 대기업 베이커리에서 제과 책임자를 맡기도 하고 때론 부산, 광주, 서울로 출강을 다니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마음 속 한구석이 허전했다. 그는 자신의 기술을 자유롭게 펼쳐 보일 무대를 찾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트리옹프 제과점을 오픈한 것은 2011년의 일이다. “프랑스 트리옹프에서 일할 때의 기억이 너무 좋기도 했고 거기서 많은 파티스리를 배웠으니까요. 오픈 전에 트리옹프 사장님을 만나 트리옹프 이름을 빌리고 싶다고 했죠” 트리옹프 사장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하여 한국에 프랑스 트리옹프와 같은 이름의 제과점이 탄생하게 된 것. 물론 제품은 프랑스 트리옹프와 똑같진 않지만 셰프는 이곳에서 그 동안 쉴 새 없이 만들어온 프랑스 파티스리와 유럽 빵을 선보인다. 특히 트리옹프의 케이크는 기념일 시즌이 되면 주문이 밀려들 정도로 주민들에게 명성이 꽤나 높다. 최근 그는 번화가인 후곡동에 2호점을 내기도 했는데 두 매장 제품의 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요즘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젠 조금 느슨해질 법도 하건만 지금도 새벽 5시에 나와 지하에 위치한 공장에서 직원들과 케이크를 만들고 빵을 반죽하는, 천생 ‘빵쟁이’인 최명갑 셰프. 작업이 끝난 후 말끔하게 청소까지 하면 그의 일과는 모두 끝이 난다. 그는 이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표현했다. “빵쟁이가 손에서 빵을 놓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저는 현장에서 일하는 게 가장 좋아요. 특히 제과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어요. 요즘도 맛있다고 하는 디저트는 먹어보고 다녀요. 기술이 부족하다 싶으면 해외로 연수도 가고요” 최명갑 셰프는 35년 동안 손에서 배합표를 놓은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 당시에는 낯선 <주날 드 파티시에> 같은 잡지들을 정독하며 꿈을 키웠고 셰프들 사이에서 외서가 유행하기 전부터 프랑스 제과 책을 살펴봤다. 혹여 맘에 드는 제품을 발견할 때면 번역가에게 5만원씩 지불해가며 배워두곤 했다. 그런 그가 이제 후배들을 키우는 데 보다 주력하고 싶다고 한다.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기술을 하나씩 마스터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면 뿌듯함을 느낀다고. “셰프는 선생님의 자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품을 만드는 데 1차적인 목적이 있다면 2차적인 목적은 그 기술을 전수하는 데 있거든요. 그런 과정에서 저 역시 성장할 수 있고 영역을 확장할 수도 있죠” 인터뷰 도중 그는 파티시에 인생의 ‘끝’까지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끝은 어디쯤에 있을까, 그 길이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