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크렘 김경록 셰프 누구보다 열심히, 누구보다 즐겁게 취재 당시 셰프의 작업하는 모습을 촬영하겠다는 기자의 한 마디에 직원들은 주방으로 몰려들었다. “사장님은 성형하는 모습이 제일 멋있어요” “웃긴 표정 지으시면 안 되요” 그러면서도 직원들은 셰프의 손놀림을 날카로운 눈으로 끝까지 지켜봤다. 단체사진 속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마치 라크렘의 직원회식에 온 듯했다. 이토록 에너지가 넘치는 공간에서 즐기는 빵과 케이크라면, 그런 사람들이 만드는 음식이라면 애써 포장하지 않아도 무엇이든 맛깔날 것 같았다. 사람 좋아하고 먹는 걸 좋아하는 것이 적성이라는 남자. 양재역에서 14년째 자리를 지켜온 빵집 라크렘의 중심에 김경록 셰프가 있다. 취재·글 박소라 사진 이재희 스무살 청년, ‘빵쟁이’라는 옷에 첫 단추를 끼우다 주관이 뚜렷한 사춘기 소년은 문득 자신의 인생에 의구심이 일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일까. 책상 앞에 앉아 있노라면 엉덩이가 들썩이고 성적은 밑바닥을 헤맸다. 친구들이 어떤 대학교를 갈지 고민할 때 소년은 학교에 가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이윽고 수학능력시험 성적표가 나오던 날, 그는 재수를 권하는 부모님에게 공부 말고 다른 일을 찾겠다고 선언했다. 꿈 많고 열정 많은 스무살. 김경록 셰프의 인생은 그때 막이 올랐다. 다행히도 답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셰프의 곁에는 호텔 양식부 주방에서 조리장으로 일하는 요리사 큰외삼촌이 있었다. 그는 몇 십 년 동안 요리사의 길을 걸어온 큰외삼촌의 인생이 그럴싸해 보였다. “요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큰외삼촌은 뜻밖의 길을 제시했다. 바로 ‘제과제빵’이었다. 그는 제과제빵을 배우기 위해 방법을 모색했다. 마침 건국대에 프랑스 INBP와 라이센스를 맺어 제과제빵을 교육하는 2년제 과정이 생겼다. 그곳에서 1년의 기초과정을 배우고 군대에 입대했다. “제대하고 나서 전문가반을 들어가야지 했는데 가지 않았어요. 제가 들어간 때가 1기라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거든요. 거길 그만두고 신사동 대한제과학원을 끊었죠” 기초를 다진 그는 킴스 베이커리, 홍종식 베이커리, 주재근 베이커리, 생토오레 등 여러 윈도 베이커리를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그중에서도 그는 생토오레에서 근무하던 6개월의 시간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이낙근 셰프는 오너이자 기술자로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몸소 보여준 스승이었다. 직원들과 같은 시간에 출근하는 성실함, 제품을 연구하는 열정, 완벽한 제품만을 판매한다는 원칙. 그는 이낙근 셰프를 지켜보며 각오를 다지곤 했다. 그 시대 제빵사들이 그렇듯 근무지를 여러 번 옮길 때마다 거주지 또한 바뀌었다. 짐 가방을 둘러메고 숙소를 전전하며 사는 생활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일은 고됐지만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날들이 좋았다. 그러나 셰프는 그때만 해도 빵 혹은 케이크를 만드는 일에 대한 즐거움이 무엇인지 와 닿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런 그가 제과제빵에 흥미를 붙인 것은 현대제과학원에서 강사로 일할 무렵이었다. 특히 Siba는 그의 생각을 바꿔놓은 전환점이었다. 그는 주니어 버터 케이크와 마지팬 케이크 부문이 생긴 2001년도 Siba에 학생들을 이끌고 출전을 했다.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그 역시 콩피즈리와 버터 케이크 부문에 출품할 작품을 준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대회 전날 밤에 작품을 전시하고 돌아오니까 설레서 잠이 오질 않더라고요” 결과는 완승. 학생들은 대상, 금상을 휩쓸었고 셰프는 콩피즈리 부문 은상과 버터케이크 부문 장려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에서 ‘현대제과학원’이라는 이름이 줄줄이 불리는 걸 듣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케이크를 만드는 것이 이토록 짜릿한 작업이라는 사실을 그는 처음 깨달았다. 결국 그는 혜전대 산업체 제과제빵과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원장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원장은 능력 좋은 강사를 놓칠 수 없었다. 대안을 찾던 그에게 어느 날 파리크라상에서 근무하던 하현수 셰프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에꼴 르노뜨르에서 제과를 배워보지 않겠냐는 것. 그렇게 셰프는 얼떨결에 에꼴 르노뜨르 1기 학생이 됐다. 그때 당시 르노뜨르 학비는 국내 코스만 약 450만원, 프랑스 2주 연수비용을 합치면 800만원이 넘었다. 학비를 메우기 위해 낮에는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일당을 벌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르노뜨르를 다니면서 그 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지식들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됐어요. 빵과 케이크를 만드는 데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는 것도 깨달았죠” 르노뜨르를 졸업한 후 파리크라상에 입사했지만 대기업의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시스템은 그와 맞지 않았다. 셰프는 정확히 1년 후 파리크라상을 나왔다. 셰프의 꿈이 실현된 공간, 라크렘과 두지엠 김경록 셰프는 제과제빵을 배우기 시작한 지 10년 후인 서른 살에 라크렘의 오너셰프가 됐다. 사실 라크렘은 그의 뜻이 아니었다.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했거든요. 10년 정도 더 경험을 쌓고 나서 오픈하고 싶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겨우 제과제빵이 재밌어지기 시작한 터였다. 그러나 마음 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었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친동생이 가게를 오픈하게 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동업자가 됐다. 2003년 초창기 라크렘은 베이커리 카페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셰프는 커피와 디저트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공간을 꾸몄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는 베이커리 카페를 찾아볼 수 없었던 터라 매장을 구경하러 오는 손님들도 더러 있었단다. “프랑스로 연수를 갔을 때 보니까 전부 그런 식이더라고요. 한 공간에서 빵뿐만 아니라 요리, 음료 등 다양한 음식을 접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그러나 처음부터 반응이 오지는 않았다. 손님들은 그저 신기해할 뿐이었다. 이익은커녕 6개월 만에 5,000만원의 손해를 봤다. 더구나 현장에서 일하던 습관이 몸에 밴 셰프는 손님들을 대하는 방법을 몰랐다. ‘어서오세요’ 한 마디 하는 게 어찌나 힘들던지, 그는 라크렘을 오픈한 순간부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직원들이 끝내 제 살길을 찾아 떠나고 홀로 남겨졌을 때,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먼저 손님을 마주하는 방법부터 익혔다. 아침마다 인사하는 연습을 하고 서비스업에 대한 책들을 수없이 찾아봤다. 메뉴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빵과 케이크로 조금씩 보완해나갔다. 이런 노력 덕분에 상황은 조금씩 좋아졌고 라크렘의 진면목을 제대로 봐주는 손님들도 생겼다. 그렇게 5년이 지났을까. 그는 문득 프랑스에서 봤던 베이커리의 모습을 라크렘에서도 실현하고 싶어졌다. 2009년 그는 결국 친구에게 가게를 떠맡기고 일 꾸오꼬 알마에서 이태리 요리를 배우기에 이른다. 교육 과정을 마치고 ‘보나뻬띠’에서 실전 경험도 쌓았다. 하지만 그 사이 ‘주인 없는 배’는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1년간 신경을 못 썼으니 당연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포기가 안 되더라고요” 그에게는 지금 이 길이 맞다는 확신이 있었다. 과도기를 무사히 버텨낸 셰프는 2014년 남부터미널역 근처에 레스토랑과 빵집을 접목시킨 두지엠을 오픈하고 2015년에는 라크렘을 리뉴얼했다. 다행히도 손님들은 매장 한쪽에는 빵이 가득하고 한쪽 테이블에서는 이탈리안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신개념 베이커리를 반겨주었다. 특히 두지엠의 경우 작은 공간에 오너와 손님이 옹기종기 모여 음식을 매개로 소통을 하다 보니 유독 단골손님들이 많았다고. 때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바빠질 때면 손님들이 주방에 들어와 빈그릇을 손수 설거지하기도 했단다. 사람이 있고 맘 편히 즐길 음식이 있는 곳. 그가 꿈꿔온 베이커리는 그런 공간이었다. 얼마 전 셰프는 두지엠을 논현동으로 확장 이전했다. 앞으로는 넓은 공간에서 음식과 문화적인 컨텐츠를 접목시킬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를 열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조만간 두지엠이 안정되면 라크렘의 제품들도 리뉴얼할 계획이다.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는 것 라크렘을 연 지 올해로 14년째. 10년이 넘는 기간 같은 장소에서 빵집을 운영해올 수 있던 비결로 셰프는 ‘사람’을 꼽았다. 라크렘은 직원간의 유대가 남다르다. “직원들은 이 공간을 유지시켜 주는 존재들이에요. 그 친구들이 서로 모여 밥을 먹으면서 회의를 하고 신제품 출시나 이벤트 행사 같은 걸 스스로 정해요. 각자가 라크렘의 주체가 되는 거죠” 가만 보면 그가 직원들을 교육하는 방식도 조금 독특하다. 누군가가 제품에 대해 아이디어를 내면 시연을 통해 그 제품이 완성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의 일이다. 때론 단가표를 만들거나 재료의 원가를 계산하는 작업도 도맡기는데, 훗날 한 빵집의 오너셰프가 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란다. 김경록 셰프는 자신과 같은 연배의 제빵사들이 겪었던 열악한 환경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때문에 직원들에게 무엇보다 ‘시간’을 많이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주 5일 45시간 근무제를 고집하는 것도 같은 이유. 대신 그가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몇 가지가 있다. 서로 관계가 좋아야 한다는 것과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100% 해내야 한다는 것. “젊은 시절에 힘들게 일하면서 얻은 게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가장 중요한 시간을 놓친 것 같아요. 전 후배들이 이 길을 걷기로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도록 발판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그에게 앞으로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엉뚱하게도 중식이나 일식을 배울 생각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카레라는 음식에 대해 공부하고 나서 카레 빵을 만들면 더 맛있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우연한 기회로 갖게 된 파티시에라는 직업을 한시도 후회해본 적이 없었다고 회상한다. 즐거운 인생의 한 부분에 빵과 케이크가 있고 사람들이 있으며 라크렘이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가 그리는 라크렘의 미래는 어쩌면 마지막 대답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는 누구든지 제 매장에 왔을 때 무언가를 얻고 즐겁게 돌아갔으면 해요. 주말에 느지막이 일어나 브런치에 커피 한 잔 마시고 싶다면 그걸 내어주고 직장인들이 일에 지쳐 간단한 안주거리와 맥주가 당긴다면 또 그걸 내어주고… 저는 그저 빵과 어울리는 요리들을 선보이고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는 것뿐이죠. 참 매력적인 직업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