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드앤브릭 윤연중 셰프 매일매일 전진하는 야심가 자신만의 좌표를 갖고 사는 사람은 쉽게 길을 잃지 않는다. 혹여 방향을 잃어버리더라도 금방 점과 점을 연결해 새로운 인생의 선을 만든다. 윤연중 셰프에게 좌표는 ‘제과제빵’이다. 최근 프랑스와 한국을 넘나들며 인생의 큰 획을 그은 그를 삼청동 우드앤브릭에서 만났다. 취재․글 구명주 사진 이재희 2015년 1월, 윤연중 셰프는 프랑스 리옹에서 생애 가장 뜨거운 순간을 보냈다. 세계 유수의 셰프가 모여 경합을 벌이는 ‘쿠프 뒤 몽드(La coupe du monde de la patisserie)’에 출전한 것이다. 팀장이자 글라시에로 대회에 나간 그는 얼음가루를 휘날리며 차디찬 얼음을 깎고 또 깎았다. 올해부터 얼음공예 규정이 얼음 1장에서 2장을 깎는 것으로 까다로워진 데다가 대회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도 촉박하기만 했다. “대회를 3개월 남짓 앞두고 대표팀에 합류했어요. 얼음공예는 처음이었기에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죠. 보통 선수들이 얼음공예를 연습할 때 얼음 100장을 깎는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2배나 많은 200장을 깎았습니다” 그러나 설탕 공예와 초콜릿 공예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스토리’를 담은 이탈리아팀, 틀을 깨지 않으면서도 창의성을 발휘한 일본팀을 보며 그는 자책했다. “왜 저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하는 한탄은 “더 잘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발전했다. “쿠프 뒤 몽드를 위한 ‘백서’를 발간할 계획입니다. 다음에 출전하는 한국팀이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요” 단단한 벽돌을 쌓듯 이직하는 셰프 욕심 많은 윤연중 셰프가 빵집에 발을 들인 건 20대 초반이었다. 건축공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그는 돌연 학교를 자퇴하고 집 주변의 자그마한 동네 빵집에 취직한다. 육중한 건축물을 우러러보는 대신, 두 손에 쥘 수 있는 한 덩이 빵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제빵을 시작하긴 했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갈증을 느꼈다. 결국 6개월 만에 빵집을 관둔 그는 한미제과제빵학원에서 제빵의 A부터 Z까지 다시 배운다. 기본기를 다졌으니 무난하게 취직할 수 있었지만, 그는 취업 대신 유학을 택했다. 1년간 일본에서 어학연수를 마치고, 그가 들어간 곳은 동경제과학교. 그러나 인생이란 예기치 못한 변수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동경제과학교에 입학한지 8개월이 됐을 무렵이었다. 갑작스러운 집안 문제로 윤 셰프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불가피하게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응어리는 셰프를 달리게 하는 채찍이 되었다. “학업을 중단해서인지 마음 한 구석에 늘 아쉬움이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혼자서 더 독하게 기술을 배웠습니다” 윤연중 셰프는 한국에 오자마자, 저돌적으로 업계에 뛰어든다. “파티스리 에구치에서 일하면서 많은 걸 느꼈죠. 새벽부터 늦게까지 묵묵하게 일하는 에구치 셰프는 ‘원칙대로’ 빵을 만들었거든요” 셰프는 윈도 베이커리에 머무르지 않고 방향을 바꿔 호텔 주방에도 발을 들였다. “제빵사가 아니었다면 요리사가 됐을 것”이라는 그는 요리, 빵, 디저트가 하나로 움직이는 호텔에 매력을 느꼈다. “호텔에서 근무한다면 남다른 경험을 쌓겠더라고요. 가령 예를 들면 플레이트 디저트나 식전 빵, 식후 디저트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당시 이탈리아 요리를 만드는 셰프들과 친해져 소스를 만드는 법도 일부러 배웠죠” 호텔에서 일한 경력 덕분에 그는 빵에 요리를 접목한 조리빵을 잘 만들 수 있게 됐다. 그가 이직할 때 가장 먼저 따지는 문제는 “새 일터에서 나는 무엇을 배울 수 있나, 얼마나 성장할 수 있나”다. 호텔 다음으로 그를 이끈 곳은 나폴레옹과자점이었다. 나폴레옹과자점을 택한 이유도 막연히 ‘나폴레옹’이라는 타이틀 때문이 아니었다. 프랑스 스타일의 구움과자를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고 싶어서였다. “쇼트 브레드 쿠키 하나만 하더라도 아주 사소한 차이로 바삭하게 혹은 촉촉하게 만들 수 있어요. 나폴레옹에선 구움과자라는 한 종목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좋아하는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윤연중 셰프의 다음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롯데백화점 잠실점의 보네스뻬에 취직한 것이다. “저는 제과제빵 업계를 크게 윈도 베이커리, 프랜차이즈 베이커리, 호텔, 대기업이 운영하는 준양산업체로 분류해요. 가능하다면 4개의 분야에서 모두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죠” 새로운 일을 즐기는 그는 보네스뻬 점장으로 일하며 관리자에게 중요한 자질을 길렀다. “보네스뻬에선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떤 빵을 얼마나 생산할지, 어떻게 마케팅을 하고 어떤 방식으로 팔지, 직원을 어떻게 다룰지 등을 알 수 있었거든요. 빵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파는 방법까지 터득하게 된거죠” 봄이면 여름 상품을 먼저 생각하고, 여름이면 겨울을 빠르게 대비하는 습관은 이때 생겼다. 당시 200여 개에 달했던 보네스뻬 매장 중에서 그가 운영했던 잠실점은 전국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인정받는 리더였다. 걸림돌에 넘어지지 않고 잘 나가던 그를 멈춰 세운 건 다름 아닌 셰프 자신이었다. 갑자기 몸과 마음이 방전되자 주변의 소리가 그제야 들렸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딸, 어리기만 한 아들, 워킹맘으로 일하는 아내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좋은 아버지와 남편이 되고자 마음먹자, 업계를 떠나야겠다는 결단이 섰다. 셰프는 돌아보지 않고 셰프복을 벗었다. “좋아하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은 다르다”는 걸 깨달은 그는 빵 냄새가 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에 취직했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을 찾았지만, 무미건조한 삶에 그는 조금씩 지쳐갔다. 불과 6개월이 지났을 무렵, 결국 그는 빵집을 기웃거렸다.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소년처럼 빵을 들었다가 놨다가를 반복하던 날이었다. “빵을 만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건만, 어느 순간 보니까 빵에 꽂혀 있더라고요. 요즘 빵의 트렌드는 어떤지 궁금해하면서요” 제과제빵을 접은 그는 시든 꽃과 같았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괜찮아.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해” 제2의 발판을 만들어 준 ‘달인의꿈’ 다시 밀가루를 만질 수 있다면 빵집의 규모는 중요하지 않았다. 1년 반 만에 제자리를 찾은 윤 셰프는 집에서 5분 거리인 양주의 어느 빵집을 무작정 찾아간다. 그에게 다시 셰프복을 내어준 곳은 농협 하나로마트 안에 자리한 달인의꿈이었다. 그는 그동안 어떤 곳에서 일했는지, 제과기능장이라는 신분도 밝히지 않고 달인의꿈으로 출근했다. 다행히 달인의꿈 원강희 대표는 양주에 숨어 있는 그를 한눈에 알아봤다. ‘조그만 마트 빵집에 머물기엔 큰 그릇’임을 눈치챈 원 대표는 윤연중 셰프를 기술이사로 승진시킨다. 그때부터 윤 셰프는 날개를 단 사람처럼 원강희 대표와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다. 처음 달인의꿈에서 일할 때만 해도 5개에 불과했던 점포가 나중에는 20여 개까지 늘었다. “원강희 대표님은 ‘안 된다고 하지마라. 일단 해보라’고 늘 얘기하세요. 뭐든지 도전하고 노력하는 법을 대표님 곁에서 많이 배웠죠” 삼청동에서 다시 쓰는 이야기 그가 애정을 가지고 일했던 달인의 꿈을 떠난 건 프랑스 브랜드인 ‘곤트란쉐리에’의 총괄 셰프로 합류하면서였다. 작년 6월, 윤 셰프는 곤르트란쉐리에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파리 현지로 연수를 떠났다. “프랑스 셰프들을 보면 참 쉽게 빵을 만들어요. 종 반죽을 살짝 맛보기만 해도 어떤 빵이 나올지 바로 알더군요. 또 밀가루를 이해하는 능력부터가 달라요. 종류가 다른 밀가루를 혼합해 자신이 원하는 식감의 빵을 뚝딱 만들어내죠” 무신경해 보이지만 직감적으로 빵을 완성하는 프랑스인을 보고나니, 셰프는 어깨가 움츠러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그를 위로한 건 프랑스인 셰프의 말 한마디였다. “나는 어떤 쌀이 좋은지, 어떤 밥이 맛있는지 잘 몰라. 하지만 윤 셰프는 밥의 윤기만 보고도 밥맛을 가늠하잖아. 어릴 때부터 빵이 아니라 밥을 먹으며 자랐으니까. 프랑스인이 빵을 쉽게 만들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야. 어릴 때부터 먹고 자란 ‘익숙한’ 음식이기 때문이지” 프랑스인과 한국인은 출발선부터가 다르다는 걸 인지하고 나니 용기가 샘솟았다. “무조건 많이 먹어보고, 많이 만든다면 프랑스인처럼 감각적으로 빵을 느낄 수 있겠구나” 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곤트란쉐리에의 제품을 만들고, 운영하는 데 힘을 쏟았다. 덕분에 곤트란쉐리에는 1호점인 서래마을뿐만 아니라 대치동, 삼성동 등에 매장을 늘리며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윤연중 셰프는 올해 곤트란쉐리에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저기서 취업 제안을 받은 윤 셰프가 일을 시작한 곳은 삼청동 우드앤브릭이다. 서울 전역에 4개의 매장을 둔 우드앤브릭은 ‘베이커리 레스토랑’을 지향하고 있다. “빵과 요리를 함깨 파는 우드앤브릭의 콘셉트가 마음에 들었어요. 레스토랑을 같이 운영하다 보니 채소, 소스 등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무궁무진하잖아요. 앞으로 요리지만 빵 같고, 빵이지만 요리 같은 제품을 개발해나갈 계획입니다. 또 주말이 되면 중국인, 일본인이 많이 찾아와요. 외국인이 좋아하는 특별 제품도 준비해야죠” 쿠프 뒤 몽드에서 글라시에로 활약했던 그는 요즘 아이스크림에 빠져 있다. “에클레르, 초콜릿 등 한 부문을 특화한 전문점이 늘고 있습니다. 아이스크림 부문은 아직까지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소르베, 젤라토 등을 더 공부해보려고요” 그래서 올해 여름에는 우드앤브릭의 인기 제품인 마카롱 아이스크림을 보다 적극적으로 판매할 생각이란다. 올해 또 하나의 목표가 더 생겼다. 매듭짓지 못한 ‘학업’의 끈을 붙잡은 것. “일요일마다 서울호서전문학교로 등교해요.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12시간씩 식품조리학과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저는 배우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참 좋아요. 최종 저의 꿈은 제 가게를 운영하면서 제과제빵을 가르치는 거예요” 쿠프 뒤 몽드에 출전한 뒤 비로소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달았다는 윤연중 셰프. 우물을 부술 수 없기에 윤 셰프는 우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다리를 만드는 중이다. 누구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뛸 수 있게 해줄 튼튼한 사다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