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전이 즐겁다 크로네베이커리 나정호 셰프 크로네베이커리는 30년 가까이 회기동을 지킨 집념의 빵집이다. 잠시 가게 문을 닫았던 적이 있긴 하지만, 2005년 경희대학교 병원 근처로 자리를 옮긴 뒤론 흔들림이 없다. 크로네베이커리의 역사를 훑으면 한 남자의 인생이 보인다. 27년간 크로네베이커리에서 빵과 과자를 만들어온 나정호 셰프. 그는 제빵사를 꿈꾸는 딸에게 모범이 되고자 오늘도 묵직한 반죽을 두 손에 쥔다. 취재․글 구명주 사진 이재희 기술 하나로 서울에서 살아남기 경희대 학생에게 크로네베이커리는 수없이 드나드는 학교 정문만큼이나 친근한 곳이다. 학교로 향하는 길가에 우뚝 선 빵집, 그곳에 나정호 셰프가 있다. 가게가 문을 연 년도는 1987년, 나 셰프가 제과제빵 업계에 뛰어든 시기는 빵집이 생긴 바로 그 다음해다. 1988년 2월, 나정호 셰프는 산으로 둘러싸인 강원도 정선에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상경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당시, 그의 손에는 키우던 개를 팔고 얻은 돈 몇 푼이 전부였다. 겨우 마련한 돈조차 서울행 차비를 내고 나니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서울에 갓 올라온 그는 한마디로 빈털터리였다. 처음 몇 달간은 봉제공장에서, 또 몇 달간은 사촌형이 책임자로 있던 한 제과점에서 일했다. ‘잘 살겠다’는 뜻을 품고 고향을 나왔으나, 서울은 생각 이상으로 비정했다. 다행히 나정호 셰프는 운이 좋았다. 사촌형과 함께 제과점을 관둔 그는 형의 도움으로 크로네베이커리에 입사한다. 무더위가 한풀 꺾인 초가을이었다. 당시 그는 고작 18살이었다. 나 셰프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 물고 일했다. 아침 6시 반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빵을 만드는 나날이 이어졌지만 월급날이 오면 그간의 고생이 말끔히 사라지는 듯했다. 가난의 설움을 잘 알았던 그는 고되게 빵을 만들어 번 돈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월급을 받으면 은행으로 달려가 적금 통장에 차곡차곡 모았어요. 처음엔 월급의 90%, 나중엔 월급의 100%를 저축했죠. 수중에 돈이 없다보니 신발이 너덜너덜해져도 신발 한 켤레 살 수조차 없더군요” 그런 그에게 크로네베이커리는 잠잘 곳을 내어주고, 먹을 것을 챙겨주는 소중한 보금자리가 돼 주었다. 권태기를 없애준 장모님의 케이크 그러나 크로네베이커리에서 일한 지 10년이 됐을 무렵, 권태기가 찾아온다. 인형을 팔아볼까, 다른 기술을 배워볼까 그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크로네를 떠나려는 그에게 크로네베이커리의 사장은 “한 달만 쉬고 오라”며 그를 잡았다. 나 셰프가 휴식 차 찾은 곳은 아내의 고향, 온양이었다. 때마침 찾아온 장모님의 생신을 위해 그는 작은 이벤트를 하나 벌인다. “명색이 사위가 셰프인데, 장모님을 위해 실력발휘를 하고 싶더라고요.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 드리기로 한 거죠” 케이크 만들 장소를 물색하던 그는 온양의 작은 빵집을 방문했다. ‘서울의 제과점에서 일하는 셰프’라고 신분을 밝힌 그는 불시에 방문한 빵집에서 능숙한 솜씨로 케이크를 뚝딱 만들어 냈다. 케이크를 만드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빵집 사람들은 나 셰프를 붙잡고 “케이크 기술을 배우고 싶으니 일일 세미나를 열어 달라”고 청했다. 나정호 셰프는 기분 좋은 제안을 덥석 받아 들였다. 갑작스럽게 개최된 세미나에서 그는 신명나게 자신의 기술을 보여 주었다. “당시 시골의 빵집은 버터케이크를 주로 만들었거든요. 버터케이크가 아닌 자허 토르테, 크림치즈케이크 등 독특한 케이크를 가르쳐줬더니, 반응이 아주 뜨겁더라고요” 온양에서의 우연한 경험은 그에게 다시 셰프로 살아갈 힘을 주었다. “케이크 세미나를 하면서 느꼈어요. 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딸에게 모범이 되는 셰프이자 아버지 짧은 휴식을 끝낸 나정호 셰프는 다시 크로네베이커리로 향했다. 제자리로 돌아온 그는 마음가짐을 달리했다. 도망갈 생각을 하기보다 흥미로운 일을 찾고 시도해보자고. 빵과 디저트를 만드는 데만 매몰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요리의 세계에도 발을 들였다. 아들에게 맛있는 수프를 만들어 주고 싶어 레스토랑에서 수프 만들기를 배웠고, 동네 중국집에서 탕수육 튀기는 법을 갑자기 배운 적도 있다. 분야가 다르긴 하지만 이런 경험들은 모두 새로운 빵이나 디저트를 만들 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나 셰프는 늦깎이 공부에 푹 빠져 살았다. 제과기능장 시험에 도전해 2007년에는 제과기능장 시험에 합격했으며 제과기능장이 되고 난 뒤엔 바로 검정고시까지 준비했다.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무사히 통과한 그가 목표로 삼은 대학교는 아니나 다를까, 경희대학교였다. 경희대 외식경영학과 12학번이 된 나 셰프는 주방에서 빵을 만들다가 학교로 달려가 수업을 듣고, 반대로 수업을 듣다가 돌아와 빵을 만드는 생활을 병행했다. 창업기술이나 상권분석을 배울 수 있는 수업은 한 번만 듣기 아까워 녹음을 해두고 복습하기도 했다. 남들보다 한 발 늦었으니 더 열심히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2015년 2월 12일, 그는 드디어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기에 이른다. 열심히 사는 아빠를 바로 옆에서 응원하는 사람은 딸, 혜준이다. 혜준이의 꿈 역시 아빠처럼 제빵사가 되는 것이다. 크로네의 주방은 딸 혜준이에게 놀이터와 같았다. 그래서인지 혜준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의젓하고 능숙하게 빵 반죽을 만질 줄 안다. 심지어 가게가 쉬는 날, 나 셰프는 혜준이와 단 둘이 주방에 남아 빵을 만들 때도 있다. “일이 바쁘다 보니 아이와 놀아줄 시간이 없더라고요. 딸과 친해지고 싶어, 빵집에 데려와 함께 있거나 업계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도 데려가요” 아빠의 손놀림을 그대로 보고 배우는 예비 제빵사, 혜준이 때문에라도 나 셰프는 보다 맛있고 훌륭한 빵을 만들고 싶다. 경희대학교 병원과 가까운 덕분에 선물용 제품은 특히 인기다. 크로네베이커리의 대표적인 선물용 제품은 만주. 손놀림이 빠른 나정호 셰프는 만주를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최근에는 만주를 만들다가 신제품을 개발하기도 했다. 오븐에서 실수로 태운 시나몬 만주를 가지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본 것이다. 시나몬의 알싸한 풍미가 느껴지는 ‘시나봉’은 실패를 바탕으로 얻어낸 신제품이다. 이것저것 새로운 제품을 시도할 때마다 그는 마치 높은 산에 올랐다가 내려온 것만 같은 짜릿함과 뿌듯함을 느낀다. 농장에서 수확한 좋은 재료를 쓰다 나정호 셰프가 살아온 나날은 크로네베이커리가 성장해온 시간과 맞먹는다. 10대의 셰프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동안, 크로네베이커리도 조금씩 사세를 확장했다. 크로네의 모토는 ‘몸에 좋은 빵 만들기’다. 버터, 설탕, 달걀을 넣지 않은 호밀빵을 꾸준히 연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많이 먹어도 속이 편한 빵’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들 중에는 크로네베이커리의 홈페이지에서 꾸준히 빵을 주문해 먹는단다. 실제로 온라인 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어 클릭 한 번만으로 크로네의 제품을 구입할 수 있다. “인터넷 손님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몇 년 전에는 건물 3층을 아예 인터넷 주문용 빵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만들었습니다” 3층 공장에서 한 층을 더 오르면 건물 옥상이 나온다. 옥상은 빵을 만들다 지친 나 셰프에게 신선한 에너지를 주는 아지트이기도 하다. 회기동 일대가 훤히 보이는 옥상에는 신기하게도 감나무, 포도나무 등이 심어져 있고 닭도 자라는 중이다. 대학가 주변에서 농사를 짓고 닭을 키우다니, 진기한 풍경이다. 농사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매장에 진열된 고구마와 검은콩은 크로네농장에서 수확한 것이다. “강원도 홍천에 크로네농장이 있습니다. 그 농장에서 직원들은 고구마와 검은콩을 직접 수확하지요” 이렇게 생산된 고구마와 검은콩은 ‘검은콩 통밀 베이글’, ‘검은콩 통밀 식빵’, ‘고구마 유기농 호밀빵’ 등을 만들 때 활용되고 있다. “박리다매를 추구하는 빵집에선 직원들이 오래 일하기 어려워요. 직원도 지치고 가게도 오래 살아남을 수 없죠. 우리 회사 직원들은 근속연수가 상당히 높습니다. 10년차 셰프도 3명이나 되죠. 다 같이 농작물을 수확하고, 종종 여행을 떠나고, 또 돌아오면 열심히 우리 스타일의 빵을 만듭니다” 나정호 셰프는 자신의 SNS에 올린 두 장의 사진을 번갈아 보여줬다. 하나는 근속 10주년을 맞은 1998년도의 사진, 또 다른 하나는 25주년을 맞은 2013년도의 사진이었다. 10주년 당시 그는 황금거북이를, 25주년에는 회사로부터 황금열쇠를 받았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일하는 셰프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자리에서 버틴 길고 지난한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