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집 베이커리 마용호 셰프 외유내강의 힘 방배동으로 취재를 나갔다가 어느 빵집의 풍경을 한참 동안 구경한 적이 있다. 오후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빵집에는 쟁반 가득 빵을 수북하게 쓸어 담는 손님, 찹쌀떡 선물세트를 사가는 손님으로 꽉 차 있었다. 대체 어떤 빵집이길래, 대체 누가 빵을 만들길래 이렇게 생동감이 넘치나. 빵집의 이름은 행복의집 베이커리, 빵을 책임지는 총괄 셰프는 제빵 경력 30년의 마용호 셰프였다. 셰프는 인터뷰 시작 전, “해 줄 얘기가 없어 걱정”이라 했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1985년부터 2015년까지 무려 30년의 세월을 압축하기엔 오히려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취재 글 구명주 사진 이재희 베이커리의 부흥기, 응답하라 1985 마용호 셰프는 한때 빵의 도시로 불렸던 대구에서 자랐다. 베이커리의 황금기였던 1985년대, 사회에 첫발을 디딘 그는 운이 좋게도 대구에서 내로라하는 황제당에서 처음 빵을 배웠다. 사실 그는 경마 기수가 되고 싶었다. 힘센 경주마를 타고 신나게 달리는 삶을 살리라. 말이 좋기도 했거니와 ‘키가 작은 사람’을 뽑는다는 신체조건 또한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기수 시험에 낙방하고 만다. 제빵사는 기수의 차선책이었다. 황제당과 황제당의 서브 브랜드인 세로방에서 근무를 했던 그는 어느 날 고향을 떠난다. 두 번째 직장은 대전 에펠제과였다. 제빵사의 삶은 가혹했다. 황제당에서 근무할 때보다 훨씬 더 강도 높게 빵을 만드는 나날이 이어졌다. “새벽 4시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아침잠이 많은 터라 정말 괴로웠죠. 박스를 쌓아둔 곳 옆에서 깜짝 잠든 날이 있었어요. 잠시 졸았겠거니 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4시간이 흐른 뒤였죠. 선배들은 제가 도망간 줄 알았다더군요” 대구와 대전을 거쳐 그는 서울에 올라가기로 마음 먹는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직이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기수 시험에 재도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말을 탈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기수 시험에 응시하기도 전에 그는 ‘나이 제한’이라는 문턱에 걸리고 만 것이다. 두 개의 문 중 하나의 문이 굳게 닫히자 그제야 셰프는 깨닫는다. 베이커리 업계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연남동에 생산공장을 두었던 바로방, 목동의 바네트 과자점을 거쳐 그는 인천 안데르센 과자점, 울산 상그리아 과자점으로 옮겨 다니며 부지런히 빵을 배웠다. 심지어 안데르센 과자점과 상그리아 과자점에서는 제과장이라는 직함도 달았으니, 만족도는 더 높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빵을 기술이라 생각하지 못 했던 것 같아요. 저는 기술자가 아니라 직장인이었어요. 베이커리라는 직장에 다니는 월급쟁이요” 기술자로 다시 태어나다 그의 제빵 인생에 일대의 변화가 찾아온 건 1994년 무렵이다. 업계에 발을 들인지 10년이 돼 가던 무렵, 마용호 셰프는 일산 프랑세즈 제과점을 총괄하는 셰프가 됐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10년간 빵을 만들었는데, 과연 지금 이 기술로 나는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요. 기술이 형편 없다고 판단했어요. 저를 바라보는 후배들도 많은데, 정작 저는 제빵의 본질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거든요” 제빵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터득하는 것이라 여겼지 한 번도 진지하게 제빵의 원리나 개념을 공부한 적이 없었다. 뒤늦게 그는『재료과학』등 제과학교에서 교재로 쓴다는 책을 선배로부터 얻어 열심히 읽기 시작한다. “보통 발효실 온도를 35℃로 맞추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한번도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공부를 하고 나서 이스트가 왕성하게 활동하는 온도가 30~35℃고, 그 온도를 지키면 발효가 잘 된다는 원리를 터득했죠” ‘진짜 기술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셰프는 책임자 자리에서 자발적으로 내려와 중간급 셰프로 성내동 팡스 오페라에 취직한다. 지금은 누군가를 통솔하는 관리자가 아니라 다른 셰프에게 기술을 더 배워야 할 때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제과제빵을 제대로 정립해야겠다는 단단한 각오를 하고 들어가서였는지, 그동안 수없이 만들어왔던 빵이 낯설고 새롭게 다가왔다. 기술은 배우고 배워도 끝이 없었다. 미도 엠마 제과에서 일할 때는 ‘초콜릿’ 때문에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한번도 제대로 초콜릿을 만들어 본적 없었던 그에게 초콜릿 주문이 들어온 것. “저는 뭐든지 일단 최선을 다 해보려고 해요. ‘안 된다’, ‘못 한다’는 말은 일단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노력을 해본 뒤에 내뱉어야죠” 그는 초콜릿이 두려웠지만 피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지금 초콜릿 제품을 능수능란하게 만들 수 있다. 강남 한복판에서 뉴욕제과를 이끌다 2000년대 이후 셰프의 삶은 잔잔하고 평온해 보였다. 몇몇 윈도 베이커리를 거친 셰프는 원광대학교 원탑베이커리의 제과장이 되었다. 당시 학교가 운영하던 빵집이었으니, 일반적인 베이커리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업무는 쉬웠고 치열하지 않았다. 잔잔한 일상에 젖어 있던 셰프를 흔든 건 후배 셰프의 전화 한 통이었다. 뉴욕제과에 근무하던 후배가 자신의 자리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뉴욕제과라 하면 강남역 한 복판을 차지하고 선 서울의 대표 빵집이 아니던가. 부담스러운 마음에 손사래를 쳤던 그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면접을 본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예상과 달랐다. “뉴욕제과로 출근하자마자 큰 충격을 받았어요” ‘뉴욕제과’라는 이름과 달리 생산시설이 부족하고 시스템도 체계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낡고 성능이 낮은 오븐으로 그는 겨우 겨우 빵을 생산해 나갔다. 다행히 제과기능장 최종 합격이라는 통보가 지친 그를 위로했다. 강남역 한복판에 ‘35회 제과기능장 합격’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제가 일한 지 1년이 지났을 즈음 뉴욕제과 사장님이 방문을 했어요. 어떤 게 필요하냐고 묻기에 오븐을 더 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죠. 다행히 2005년경 뉴욕제과는 설비를 확충하는 리모델링을 실시했습니다. 시설이 좋아진 덕분에 매출도 크게 올랐죠.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케이크 3,500개를 팔았다니까요” 당시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상권에서 빵을 만들다는 자부심을 느꼈다. 2004년부터 일했던 뉴욕제과를 떠난 건 2011년 무렵이었다. 파리크라상, 뚜레쥬르 등을 비롯해 각종 프랜차이즈 카페가 강남역에 세포 번식하듯 점령한 상태였다. 셰프가 뉴욕제과를 뜬 뒤 제과점 자리에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의류 전문점이 들어섰다. 지금도 그는 강남역에 나갈 때마다 뉴욕제과를, 뉴욕제과에서 일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제가 나오고 뉴욕제과는 제과장을 뽑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제가 뉴욕제과의 마지막 제과장이었던 거죠” 행복한 내 일터, 행복의집 베이커리 뉴욕제과를 관둔 셰프는 ‘행복찹쌀떡’으로 유명한 행복의집 베이커리의 제과제빵팀을 이끌고 있다. 행복의집 베이커리는 1988년 경기도 과천에 처음 문을 연 역사 깊은 빵집. 과천점과 방배점을 오가며 빵을 만드는 그는 방배점에 더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행복의집 베이커리가 방배동에 2호점을 낼 때 합류했어요. 찹쌀떡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방배점이 처음 생겼을 땐, 빵이 많이 팔리지 않았죠. 다행히 지금은 빵을 찾는 손님들이 많이 늘었어요. 어떻게 하면 손님들이 빵을 좋아할까 늘 고민하며 살아요. 매일 긴장하면서요” 현재 셰프의 일터인 행복의집 베이커리는 수 십년째 사랑받고 있지만, 오랜 역사가 무색하게 사라져간 빵집이 훨씬 더 많다. 셰프가 처음 근무했던 대구의 유명 빵집 황제당, 으리으리했던 서울의 뉴욕제과는 역사의 뒤안길로 허무하게 사라졌으니까 말이다. 빵집은 없어졌지만 셰프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밀가루와 사투를 벌인다. “다른 업종으로 눈을 돌린 적이 한번도 없어요” 좋은 셰프가 되기 위한 덕목으로 꾸준함을 꼽는 그는 겸손하면서도 당당하다. 인터뷰 도중 그가 꺼낸 ‘검도’ 이야기는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1990년대 초반에 검도를 시작했어요. 공장장 생활을 하려면 체력을 키워야 할 것 같아서요. 내년이면 검도 4단이 됩니다. 이제 시험 하나만 통과하면 검도 사범을 할 수도 있고, 검도관 관장도 할 수 있지요. 검도를 취미로 시작할 때 제가 이런 수준까지 오를 거라 생각하지 못했죠. 이게 꾸준함의 힘입니다. 좋은 셰프가 되고 싶다면 일단 묵묵하게 견뎌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