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8주년 기념 인터뷰 임피리얼 팰리스 서울 박규봉 셰프 40년의 시간과 99%의 노력이 이룬 결실 인터뷰 당시, 촬영을 위해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셰프복을 부러 갖춰 입었다는 박규봉 셰프에게선 오랜 경력에서 오는 위엄보다는 친근함이 먼저 풍겼다. 겸손한 말투로 “한창 잘 나가는 젊은 셰프들 말고 왜 자신을 인터뷰하냐”며 내내 쑥스러워하던 그는 유독 제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신나서 이야기할 때처럼. 올해 나이 예순 셋, 제과 경력 37년. 박규봉 셰프는 케이크를 만드는 순간만큼은 여전히 열정 가득한 청년이다. 취재•글 박소라 사진 이재희 우연히 들어간 호텔, 터닝 포인트가 되다 십대부터 일찍이 빵과 디저트를 배우는 요즘 제과입문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박규봉 셰프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고조 할아버지뻘 대선배다. 그는 한국호텔제과사협의회인 동심회의 고문이며 34년간 일한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정년 60세의 나이로 퇴직을 한 전적이 있다. 누군가는 그런 그에게 ‘이제 그만 뒷전으로 물러나야 할 때’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3월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에 제과장으로 입사하며 제과업계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호텔 셰프로 보낸 것도 모자라 60대부터 시작되는 제 2의 인생을, 그는 여전히 호텔에서 만들어가고 있다. 목포 출신인 그가 제과업계에 뛰어든 건 고등학교를 졸업한 1970년대였다. ‘밥만 먹여줘도 고마운’ 시절. 스펙을 쌓고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찾아 숱하게 이직을 하며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는 이 시대 청춘들의 모습을 그때는 찾아볼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셰프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파티시에란 직업 역시 그저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생계를 위한 그의 첫 직장은 학생 무렵 단골손님으로 자주 드나들던 동네의 다과점이었다. 간단한 빵과 음료를 팔던 작은 시골 빵집에서 셰프는 난생 처음 제과제빵에 사용되는 기기들을 접하고 빵이, 케이크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기술을 배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그때의 짧은 경험은 훗날 셰프가 제과제빵업계에 발을 디디는 유일한 연결고리가 됐다. 다과점을 그만두고 셰프는 무작정 상경을 했다. 당시만 해도 지방의 청년들이 돈을 벌기 위해 정한 것 없이 서울로 올라오곤 하던 시절이었으니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변변한 기술 하나 없이 서울에서 직장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지인이 일하는 무교동 근처의 한 무역회사에 들어간다. 당시 무역회사의 월급은 1만2000원. 편하게 몸을 누일 방 한 칸 구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화물 주차장에 버려진 자동차를 옮겨 다니며 근근이 살아가기를 2년, 셰프는 군대 입대와 동시에 무역회사를 나왔다. 그의 나이 스물 셋이었다.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 입사한 것은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1979년의 일이다. 박규봉 셰프는 당시 호텔 베이커리에서 일하고 있던 먼 친척의 도움으로 그랜드 하얏트 서울 호텔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제과를 배우기 싶었다기보단 말 그대로 ‘취직’이었어요. 무역회사보다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과장님이 이끄는 대로 뭣도 모르고 제과팀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게 시작이 됐죠” 그 무렵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는 ‘미스터 마이스터’라고 하는 체구가 우람한 스위스 출신의 총괄셰프가 있었다. 그가 흰 셰프복을 입고 긴 셰프모를 반듯하게 쓰고 자박자박 걸어 다니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단다. 셰프는 그 순간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학생 때 미술 계통에 소질이 있었던 셰프는 다행히 제과 일이 적성에 딱 맞았다. 처음에는 재료를 준비하는 일이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근무가 끝나면, 호텔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친척을 붙잡고 생크림과 무스케이크 만드는 법을 익히는가 하면 동료들이 9시간을 일할 때 그는 12시간씩 일하며 맡은 임무를 성실히 끝마쳤다. 그런 그의 능력과 열정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본 사람은 다름 아닌 미스터 마이스터였다. 마이스터 셰프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박규봉 셰프는 10여 년 만에 제과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됐다. 34년이라는 시간만큼 축적된 노하우 카스텔라 반죽을 겨우 완성하던 신입 사원이 60여 명을 거느리는 제과팀 책임자가 되기까지, 셰프는 배우고 또 배우고 차츰 성장해왔다.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서의 시간은 그에게 있어 수련의 과정과도 같았다. 무엇보다 기술에 대한 갈증은 일분일초의 시간마저 아낌없이 쏟아 부을 만큼 셰프를 매혹시켰다. 그랜드 하얏트는 셰프들의 교류가 세계적으로 활발한 호텔이다. 이러한 호텔의 시스템은 셰프를 한층 더 성장시키는 동시에 호텔 셰프에 대한 만족도를 높였다. 그는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서 일하는 동안 20여 명의 해외 페이스트리 셰프들과 팀을 이뤘다. 그런가하면 때로는 중국,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스위스 등 전 세계에 분포된 하얏트 호텔로 파견 근무를 나가기도 했다. 각국의 셰프와 일을 한다는 것은 즉, 전 세계의 디저트를 경험해볼 수 있다는 의미. 셰프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얼마나 값진 경험인지 알게 됐다.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판매하는 인터내셔널 디저트들은 모두 똑같지만 그 외에 지점마다 각 나라의 특색이 담긴 디저트를 만들어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요. 다양한 나라의 디저트를 경험해보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제겐 매순간 메리트로 다가왔어요” 셰프는 호텔에서만 주어지는 기회를 발판 삼아 케이크, 초콜릿, 페이스트리, 프랑스 빵, 독일 빵 가릴 것 없이 기술을 섭렵했다. 그렇게 그는 첫 입사해인 1979년부터 만 58세로 정년퇴임을 한 2013년까지 무려 34년을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서 근무했다. 강산이 세 번을 변하고도 남는 34년. 호텔 업계 역시 88올림픽을 기점으로 무수한 변화를 겪으며 전성기와 하향기를 오르내릴 때도 그는 한눈 한 번 팔지 않았다. 박규봉 셰프가 호텔에 있었던 수많은 시간들은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역사였고 그가 만든 디저트는 곧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디저트였다. 다시 호텔로 돌아오다 하지만 이대로 제과 인생을 마무리하기에 셰프가 가진 열정의 무게는 너무나도 묵직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것일까. 퇴임을 3개월 앞둔 어느 날 김영모 명장이 호텔로 그를 찾아왔다. “윈도 베이커리에서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김영모 명장의 제안은 아쉬움과 미련으로 가득한 셰프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그렇게 셰프는 2014년 1월 김영모 과자점에 입사해 1년간 생산부장으로 일했다. 그의 제과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윈도 베이커리였으며 34년만의 짧은 ‘외도’였다. 호텔을 나온 후 셰프는 매순간 호텔에서의 삶을 그리워했다. 인생의 반을 호텔에서 보냈으니 당연했다. 호텔은 그에게 있어 마음의 고향이었다. 산란 시기가 되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오는 새들처럼, 결국 셰프는 다시 호텔을 찾았다. 그의 실력과 열정을 높이 평가한 임피리얼 팰리스 서울 호텔 왕성철 본부장의 배려 덕분이었다. 임기를 마치고 떠난 사람이 원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그저 ‘제과가 좋아서’ 내린 결정이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큰 각오가 필요했다. “언젠가 그만둬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후배들에게 길을 터줘야 한다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아직은 이루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아요.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로 남을 것 같았죠. 그 동안 시도해보고 싶었던 제품들, 조금씩 쌓아온 기술들을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에서 펼쳐 보이고 싶어요” 지난해부터 임피리얼 팰리스 서울의 제과팀을 이끌게 된 셰프는 요즘 마음껏 기술 발휘를 하고 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임피리얼 팰리스의 베이커리 숍인 아마도르 델리의 디저트를 리뉴얼하는 것. 셰프는 케이크, 쿠키, 초콜릿 등 디저트 메뉴를 100% 변경했고 레시피를 전면 수정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 4월 임피리얼 팰리스는 아마도르 델리를 없애고 뷔페인 패밀리아의 디저트 코너를 보다 강화했는데, 이때도 셰프의 오랜 경험과 능력은 빛을 발했다. 무스케이크, 타르트, 마카롱 등 인디비주얼 디저트를 비롯해, 브레드 푸딩, 판나코타 감 수프와 같은 핫 디저트도 추가해 다양한 메뉴로 구색을 맞추었으며 신선하게 즐길 수 있도록 냉장 쇼케이스를 설치했다. 재오픈한 지 2개월 남짓이지만 패밀리아의 디저트는 벌써부터 손님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셰프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에서 선보일 디저트들이 가득하다. 계절별로 변화를 주는 뷔페 디저트와 웨딩 디저트, 시트 사이에 과일 젤리를 넣은 케이크, 세계의 셰프들과 일하면서 터득한 아시아, 싱가포르, 중동 지역의 디저트 등 아직 소개하지 못한 제품들이 무궁무진하단다. 꿈 많은 63세 파티시에의 자화상 박규봉 셰프는 지금도 방산시장에 가면 깍지, 틀 같은 제과제빵 소품들을 잔뜩 구입해오곤 한다. 뿐만 아니라 데커레이션이 생소하거나 독특한 제품들을 발견하면 지인들을 총동원해 기술을 익혀야 직성이 풀리고, ‘어디 빵집이나 디저트 숍이 맛있더라’는 소문을 들으면 그 길로 찾아가서 직접 제품을 먹고 만들어본다. 그의 휴대폰은 제과제빵에 관련된 해외 동영상과 사진으로 꽉 차 용량이 부족할 정도다. 4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같은 일을 했으니 지겨울 법도 하건만, 박규봉 셰프는 단 한 번도 제과에 대한 흥미를 잃어본 적이 없다. 그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제과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신이 난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말을 가장 많이 했고 실제로 그는 그 말에 책임을 지고 있었다. “전 여전히 디저트를 만드는 게 즐거워요. 어디든 제가 있을 곳이 있다면 최대한 할 수 있을 때까지 디저트를 만들 거예요”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노력은 배신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책 한 권 두께가 될 정도로 두둑하게 쌓인 레시피 파일을 볼 때, 무탈하게 장성한 두 딸을 볼 때면, 그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노라고 지난날들을 회상한다. 늘 남들보다 한 발 더 뛰고 두 배는 더 노력하며 시간을 앞질러 달리던 셰프는 이제야 비로소 조금씩 시간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됐다. 언젠가는 마지막이 될 ‘파티시에로서의 인생’을 제대로 마무리하기 위해,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그는 ‘지금’을 열심히 살아가는 중이다.